ASML은 반도체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입니다. 반도체 핵심 장비인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노광 장비를 독점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죠. 삼성전자, 인텔, TSMC 등 세계 주요 파운드리 기업 모두 ASML의 EUV 장비 없이는 나노미터급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 쏟아지는 수요에 EUV 장비 구매 계약을 맺어도 실제 납품까지는 1년이 넘게 걸리는 상황인데요. ASML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를 납품하는 을의 위치에 있지만,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협상력은 높은 ‘슈퍼 을’인 셈입니다.
오늘은 반도체 생산에서 EUV가 왜 중요한지, ASML이 어떻게 유일한 EUV 제조 업체로 성장했는지, ASML이 그리는 미래까지 자세히 담아봤습니다.
1. EUV, 그게 대체 뭐길래?
EUV는 반도체 공정 중 노광 단계에 사용되는 장비입니다. 노광 작업은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는 중요한 공정인데요. 이 때문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EUV 생산기술을 보유한 ASML이 주목받는 것이죠. 점차 정교한 반도체 공정이 요구되면서 ASML의 인기도 날로 치솟습니다.
1) 반도체 공정의 핵심, 노광
노광은 실리콘 웨이퍼에 빛으로 반도체의 회로를 새기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노광은 반도체 공정 8단계(웨이퍼 공정, 산화 공정, 포토 공정, 식각 공정, 박막 공정, 배선 공정, 테스트 공정, 패키징 공정) 중 포토 공정에 해당하는데요. 전체 반도체 생산 시간과 비용 중 노광이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60%, 35%에 달하는 만큼 노광은 반도체 공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유일한 EUV 생산 업체, ASML
ASML은 전 세계에서 EUV 장비를 생산하는 유일한 업체입니다. EUV는 노광 장비 중 가장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합니다. 기존 ArF 장비보다 14배가량 얇은 회로를 그릴 수 있죠. 반도체 초미세화에 따라 EUV 장비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는데요. 이러한 수요에 힘입어 ASML은 2021년 노광장비 시장에서 91%의 점유율을 기록했습니다.
3) ASML의 끝없는 성장
반도체 시장의 성장에 따라 ASML의 성장도 계속됩니다. ASML의 매출은 2017년 89억 6,300만 유로에서 2022년 211억 7,300만 유로까지 늘었죠. 같은 기간 순이익도 20억 6,900만 유로에서 56억 2,400만 유로로 171.8% 증가했습니다. 2023년에도 매 분기 호실적을 기록했는데요. 업계에서는 ASML의 올해 실적이 작년 대비 30%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바라봅니다.
2. 노광장비 1위로 성장하기까지
ASML이 처음부터 노광 산업의 1위였던 건 아닙니다. 초기에는 일본 기업이 시장을 이끌었는데요. 일본 기업과 달리 ASML만은 EUV 장비 개발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화를 거듭한 ASML의 EUV 장비는 현재 그 누구도 따라잡기 힘든 기술력을 자랑합니다.
1) 노광 산업의 후발주자
ASML은 노광 장비 시장의 후발 주자였습니다. 초기 시장은 일본의 니콘과 캐논이 장악하고 있었죠. 노광 공정이 카메라와 비슷한 원리가 기반이라 이들에게 유리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1990년만 해도 ASML의 시장 점유율은 10%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2) EUV 장비 개발 시작
ASML이 EUV 장비 개발을 시작한 건 2006년 무렵입니다. 다양한 기능을 구현하면서 휴대하기 편한 디바이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도체의 크기도 같이 작아져야 했는데요. 반도체 크기가 작아지려면 웨이퍼에 더 많은 회로를 그릴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EUV는 기존 기술보다 14배 많은 회로를 그릴 수 있었기에 적절한 대안이었죠.
3) 실패작이었던 첫 시제품
ASML은 2006년 EUV 시제품인 ‘Alpha Demo Tools’를 출시했습니다. 최초의 EUV 장비였지만, 성능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1시간당 웨이퍼 1장을 겨우 생산해 냈으며, 초미세 공정에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4) EUV 개발 포기한 경쟁사
캐논과 니콘도 EUV 개발을 시도했지만 얼마 못 가 포기했습니다. 그만큼 EUV 장비 개발이 어려웠기 때문인데요. 기존에 사용해 온 심자외선(DUV, Deep Ultraviolet) 장비가 빛을 굴절시켜 회로를 그리는 것과 달리 EUV는 거울을 이용해 빛을 반사하는 방식을 적용한 장비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 했죠. 기술 개발에 드는 비용과 시간 모두 만만치 않았기에 다른 두 경쟁사는 일찌감치 손을 뗐습니다.
5) ASML EUV 장비의 진화
ASML만은 낙담하지 않고 꾸준히 EUV 기술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다른 두 경쟁사와 마찬가지로 ASML도 개발 과정에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EUV 장비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협력사의 자금 지원 덕에 EUV 장비 개발에 성공했죠. ASML의 EUV 장비는 2010년 ‘NXE:3100’ 출시를 시작으로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2018년 말 출시한 ‘NXE:3400B’ 모델은 시간당 약 155장의 웨이퍼를 생산하며, 오버레이도 2.5nm 수준까지 개선됐습니다.
오버레이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이전 공정에서 제작된 회로 패턴과 현재 공정에서 제작된 회로 패턴 간 수직 방향 정렬도
3. ASML의 성공 비결은?
1) 긴 세월을 버텨낸 덕분
ASML은 긴 기간의 EUV 장비 개발 과정을 버텨낸 유일한 회사입니다. EUV 장비 개발은 막대한 투자금과 고도화된 기술력이 필요합니다. 경쟁사인 캐논과 니콘은 2010년경 일찌감치 EUV 개발을 포기했죠.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 속 지속되는 수익성 악화를 버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대규모 글로벌 협력 생태계
ASML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해외의 다양한 기업과 적극적으로 협력합니다. ASML 리소그라피 장비 생산에 필요한 부품의 약 80%는 외부 기업으로부터 조달하는데요. ASML이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은 무려 5,000여 개에 달합니다.
① 한 부품당 한 기업
핵심 부품의 경우, 협력할 기업 한 곳을 선정해 해당 기업과만 협력합니다. ASML은 협력 기업과 5~10년간의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해당 기업의 기술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협력사는 ASML의 지원을 받아 기술력을 높이고, ASML은 협력사가 생산하는 양질의 부품을 독점적으로 확보하는 구조를 구축한 것이죠.
② 품질 관리 체계 QLTC
외부의 기술력을 끌어 쓰는 만큼 품질관리 문제가 발생하기 쉽죠. ASML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명 QLTC라는 철저한 품질 관리 체계를 운영합니다. QLTC는 품질(Quality), 물류(Logistics), 기술(Technology), 비용(Cost)을 의미하는데요. ASML은 최소 1년에 한 번은 협력사의 QLTC를 1등급에서 5등급으로 평가하고 문제가 발견될 경우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3) 공격적이고 과감한 M&A
더 높은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M&A도 적극적으로 진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3년, ASML은 차세대 기술인 EUV 개발을 위해 미국의 광원 전문기업 싸이머(Cymer)를 인수했는데요. 2017년에는 독일의 자이스(Zeiss)의 지분을 확보해 렌즈 등 광학장비 기술을 강화했습니다.
4) 끊임없는 연구 개발 투자
이미 노광 장비 시장의 압도적 1위지만,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한 ASML의 연구 개발 노력은 끊이지 않습니다. ASML은 매년 매출의 10%가량을 연구개발에 투자합니다. 효율적인 기술 개발을 위해 지역 거점별 R&D 센터도 구축해 왔는데요. 미국, 독일, 중국, 일본을 넘어 2024년에는 한국에도 R&D 센터가 설립될 예정입니다.
5) 효율적인 인사 정책
ASML은 기민한 의사결정을 위한 인사 구조를 운영합니다. 보통 기업 이사회는 기업의 최고 임원인 C-level급 인사로만 구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ASML은 CEO, CTO, CFO, COO, CSO 외에 EUV 사업부 부사장까지 이사회에 포함했습니다. EUV 사업에 집중하고자 실무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업부 임원을 이사회 구성원으로 임명해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게 한 것이죠. 유연 근무제도 ASML의 조직 특성을 잘 반영합니다. 반도체 산업 특성상 경기에 따른 업황 변동이 큰데요. ASML은 업황 침체로 업무량이 적을 때는 적게 일하고, 호황일 때는 필요한 만큼 추가로 일하는 유연 근무제를 운용합니다. 불필요한 노동은 줄이는 대신 이를 필요할 때 활용하는 효율적인 근무 형태를 구축한 것이죠.
4. 삼성전자와 손잡은 ASML, 더 큰 미래 꿈꾼다
ASML은 더 많은, 더 나은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합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합작 공장 설립 계획도 밝혔는데요. 몇 년 후면 기존 EUV 장비를 고도화한 하이 NA(High-NA, High Numerical Aperture) EUV를 활용한 반도체 생산이 활발해질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2 나노 미만 미세공정이 상용화될 전망입니다. 더 나아가 그다음 세대인 하이퍼 NA EUV 개발까지 꿈꾸고 있죠.
개구수(NA)란 렌즈가 빛을 모으는 능력을 나타내는 수치를 의미합니다. 개구수가 커질수록 더 작은 패턴을 그리는 게 가능합니다. 쉽게 말해 렌즈를 크게 만들어서 빛을 많이 모을 수 있게 되면 더 작은 패턴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거죠.
1) EUV 생산 역량 확대
ASML은 EUV 생산 역량을 확대해 2026년에는 연간 90대의 EUV 노광기 생산을 목표로 합니다. 현재 연간 생산 역량은 40대인데요. 이를 2배 이상으로 키우겠다는 것이죠. 하이 NA EUV 생산량도 현재는 연간 6대에 불과하지만, 2028년 무렵 20대까지 확대할 계획입니다.
2) 하이 NA EUV 생산
ASML은 더욱 고도화된 하이 NA EUV 생산에 박차를 가합니다. 하이 NA EUV는 기존 EUV의 기술을 고도화한 장비로, 렌즈와 반사경을 키워 반도체에 더 미세한 회로를 새겨 넣을 수 있습니다. 하이 NA의 렌즈 개구수는 0.55로 기존 0.33보다 높습니다. 기존 EUV가 1시간에 125~155개 정도의 웨이퍼를 생산한다면 하이 NA로는 220개의 웨이퍼를 생산할 수 있죠. ASML은 하이 NA를 넘어 렌즈 개구수를 0.75까지 확대한 차세대 하이퍼 NA EUV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3) 6.7nm 파장 연구 진행
반도체 성능을 향상하기 위해 빛 파장을 줄이는 연구도 한창입니다. 빛의 반사 문제로 렌즈 크기를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요. 빛의 파장을 줄이면 그만큼 얇은 회로를 그릴 수 있죠. EUV 장비가 떠오른 것도 기존 DUV 장비의 193nm, 248nm 파장을 13.5nm까지 단축한 덕분입니다. 하지만 ASML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파장을 6.7nm 수준까지 줄이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4) 삼성전자와의 합작 R&D 센터 설립
삼성전자와 손잡고 동탄 지역에 7억 유로(약 1조 원) 규모의 R&D 센터도 설립합니다. 하이 NA EUV 개발에 초점을 둔 R&D 센터는 2024년 완공을 목표로 합니다. ASML이 한국과 삼성전자를 택한 이유는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1위 국가인 만큼 차세대 노광 기술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인데요. 삼성전자도 ASML과 협력해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차세대 EUV 장비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ASML의 성공 비결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삼성전자와의 긴밀한 협력이 예고된 만큼 두 기업의 기술 개발이 반도체 산업과 한국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기대됩니다. 최근 노광 산업 2위 캐논이 EUV 장비에 맞서는 NIL 장비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과연 ASML의 EUV 장비에 견주는 새로운 기술이 탄생할 수 있을지, ASML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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