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트럼프 2기의 경제정책
스티븐 미란(Stephen Miran) 백악관 경제보좌관이 그 자리에 임명되기 전인 작년 11월에 쓴 글이 화제다. 트럼프 정부가 집권 후에 취하고 있는 관세정책이 충실하게 이 보고서 논지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 자료가 트럼프 2기 경제정책을 이해하는 기본교본인 셈이다.
내용이 방대하지만 매우 깔끔한 영어로 쓰여 있어서 트럼프 이후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을 긴 안목과 시각으로 이해하고 싶은 분들은 정독해 보길 권한다. 보고서에 담긴 주요 주장은 이렇다.
1) 준비자산(기축통화) 과부족
준비자산(기축통화) 과부족이 21세기 국제통화체제의 근본모순이다(트리핀 딜레마). 준비자산 수요가 달러로 집중되며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그 부작용이 미국경제를 옥죄고 있다. 날로 늘어나는 재정적자를 줄이고 달러약세를 동시에 달성해야 미국 제조업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2) 관세부과
관세부과는 그 여정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관세는 일차적으로 협상용이기는 하나 재정 수입 증대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통념과 달리 관세는 그다지 물가에 큰 영향이 없다. 관세 정책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고 쉽게 거둬들이면 안 된다.
3) 관세협상
관세협상이 마무리되면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 위한 2단계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플라자 협정 같은 가칭 ‘21세기 마라 라고 협정’ 타결이 목표다. 플라자 협정이 타결된 1985년보다 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달러약세에 협조하기 위해 보유외환을 대량으로 팔아야 하는 나라들에게는 미국이 너그러운 조건의 통화스왑을 제공한다.
4) 미국 국채의 의무적 구매
미국이 안보를 책임져 주고 준비자산도 제공해 주니 그 우산 아래서 혜택을 보는 나라들은 미국 국채를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한다. 의무구매 대상으로는 100년 만기 국채 같이 단기 상환부담이 덜한 국채가 바람직하다. 덜 우호적인 국가에게는 국채이자 중 상당액은 이용료 개념으로 차감하고 지급한다. 준비자산 공급 부담 등으로 미국 재정적자 부담이 심각한 상황에서는 적과 친구를 확실히 구분해서 경제적으로 달리 대접해야 한다(우리나라 같이 대미 무역흑자국에 안보까지 의존하는 나라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5) 관세 정책, 달러 약세를 위한 새로운 협정 도입
관세 정책, 달러 약세를 위한 새로운 협정 도입, 미국 국채이자 일부 차감 지급방안 등은 금융시장에 상당한 충격을 불러올 수 있다. 시장충격을 최소화하는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시징충격이 오더라도 마국만 손해 보는 지금의 상황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시장 불안 우려가 신정부의 대담한 정책 구상과 시도를 막을 수는 없다.
이 보고서가 제안하는 정책 중 관세를 제외하고는 실제 성공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그만큼 관세부과는 기본이고 일단 도입되면 오래갈 가능성이 높다. 한편, 새로운 달러협정이나 국채 강제인수 구상이 단기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트럼프 정부가 하다 말 거라고 방심하면 안 된다. 이번에는 작심하고 판을 흔드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 문서에는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획기적인 변화(a generational change)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트럼프 2기 동안 시장은 여러 차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수준과 모습으로 크게 흔들릴 수 있다.
경제가 지정학적 갈등을 완화해 주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세계화시대가 그랬다. 지금은 거꾸로 경제적 이해관계 대립이 지정학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시대이다. 경제를 알아야 국제정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미국과 중국의 대타협이 필요하다. 중국은 실물경제 성장에 비해 금융시장 개방이 느려 준비자산 과부족이라는 국제통화체제의 근본 모순을 악화시킨 미필적 책임이 있다. 그러기에 준비자산 선호 집중으로 달러 강세와 자국 제조업 경쟁력 약화라는 후유증을 겪고 있는 미국의 고충을 이해하고 이를 완화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협의해야 한다.
기축통화가 축복이요 부러움의 대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기축통화의 장점은 많다. 다만 이제는 준비자산 수요가 늘어나 자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상실되는 부작용이 기축통화의 장점을 상쇄한다는 우려가 커져가는 시대이다. 자국 제조업을 살리는 것은 일자리는 물론 이제 국가안보에도 필수적이다.
2. 신흥국 대융기의 시대
21세기는 신흥국 대융기의 시대이다. 중국이 앞장섰고 최근에는 인도의 부상이 눈부시다. 그런데 이들 신흥경제 대국이 준비자산국가 반열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그 결과 준비자산 공급은 경제력이 예전 같지 않은 전통 선진국들이 여전히 책임지고 있다(달러, 유로, 엔). 신흥국 대약진과 선진국 퇴조로 실물경제력과 준비자산의 수요공급 사이에 커다란 불균형이 생겼고 이것이 점점 국제통화체제의 모순과 긴장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중국과 인도가 하기 싫어서 준비자산국가 자리를 회피하는 건 아니다. 준비자산의 필수요건인 자본시장 개방을 자국경제가 감당할 능력이 안되니까 준비자산국가가 되고 싶어도 시기상조이다.
사정이 이러 하니 준비자산 과부족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마라 라고 협정’ 같은 대타협 가능성은 희박하다. 플라자 협정 성공의 추억은 강렬하지만 중국, 러시아, 인도, 중동 산유국 등 하나 같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방을 당근과 채찍을 동원해 가며 달러약세 대타협안으로 끌어들일 힘과 능력을 지금의 미국이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트럼프 2기 내내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니 상대국은 자국통화 약세로 대응하고, 미국은 다시 달러약세를 유도하려고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환율정책 수단을 동원하여 흑자국을 압박하고 싸우는 중간 강도의 상시 경제전쟁이 예상된다. 이 무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나리가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라 각자도생의 난타전이 예상된다.
한편, 준비자산의 과부족과 편중문제로 달러일극체제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먼저 브릭스 통화동맹 등 달러 없이 국제무역결제를 하려는 시도는 참여범위를 꾸준히 넓혀 나갈 것이다. 트럼프가 달러체재를 약화시키려는 이런 시도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라도 해서 미국 준비자산 공급부담이 약간 줄어드는 게 미국에 꼭 나쁘지는 않다.
제대로 된 법정화폐 준비자산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이다 보니 가장 오래된 준비자산인 금의 가치는 앞으로도 계속 각광을 받을 전망이다.
비트코인 등 크립토 자산 또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준비자산으로 지금보다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는 애칭은 그냥 생겨난 게 아니다. 미국에서는 비트코인을 전략적 준비자산으로 지정하자는 논의가 진지하다.
다가오는 이 모든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제조업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관세전쟁 이후에 본격적으로 불어 닥칠 글로벌 환율전쟁은 우리나라 원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우연히 알게 된 미란 보고서는 이런 의문과 걱정에 대해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 귀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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