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컨설팅에서 유명한 구루 중 한 명인 세스 고딘은 아직 인공지능이 세상을 휩쓸기 전이었던 2010년 ‘린치핀 Linchpin’이라는 베스트셀러 경영서를 쓰면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이 주로 다룬 내용은 개인이 부품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핵심적인 인재가 되려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전략의 예로서 문제 해결 능력, 창의적 사고, 독립적 판단력 등이 언급되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지 15년이 되어가는 현시점, 인공지능은 날로 발전을 거듭하고 로봇이나 자율주행차의 보급은 가속되며 개인이 독립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점차 축소되고 있기에, 린치핀 전략은 이 시대에 더 중요한 통찰을 준다. 이 전략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으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 린치핀의 핵심은 차별화된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1. 린치핀 전략
린치핀 전략은 집단이나 사회를 넘어, 국가로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을까? 개인에게 요구되는 창의성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외삽하여 스케일만 늘리는 방식이 아닌, 국가의 미래 전략에 합당한 방식이 있을까? 이를 알아보기 전에 현재 상황이 다중 위기가 결합된 불확실성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국제정치는 생리적으로 협력과 적대가 조변석개 하지만, 최근의 국제 정치 상황은 20세기 초중반 1, 2차 세계 대전 전간기를 연상케 할 정도로 과열 경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2010년대 들어 격화되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은 현재 전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방위적으로 전선이 넓어지고 있다. 한 때 미국에 이어 글로벌 GDP 2위였던 일본은 쇠락해 가는 자국의 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다시 과감한 투자 드라이브를 걸고 폐쇄적이던 자국의 노동과 자본 시장을 적극 개방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이란 전쟁, 중국-대만 간의 양안 긴장 고조 등 점차 증폭되는 지역 불안정성은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현재의 국제 정세는 안정적인 평화의 시기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정세이고, 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인지하게 하고 있다. 유럽 각국은 러시아의 위협 앞에 러시아산 가스와 신재생 에너지에 의존해 오던 에너지 전략을 재수립하고 있으며, 역내 산업 보호를 위한 대 중국 관세 정책 강화 등 견제 정책을 취하고 있다. 조만간 트럼프 2기를 맞게 될 미국은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누적된 무역 적자 개선을 위해 고관세율 정책을 고수하면서, 한 편으로는 제조업 리쇼어링 re-shoring 정책을 강화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간 취해왔던 세계 경찰의 포지션에서 발을 빼면서 고립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 첨단 산업에서의 극한 경쟁
첨단 산업에서의 극한 경쟁 역시 다중 위기의 한 요소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무인 이동수단, 첨단 반도체와 로봇, 에너지, 차세대 통신, 우주 항공, 양자컴퓨터 등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대기업들이 벌이는 차세대 기술과 고도로 집중된 자본이 만들어내는 치열한 경쟁은 이제 IT 영역을 넘어, 글로벌 제조업 지형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는 혁신의 모멘텀이 앞으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흐르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산업에서의 경쟁은 곧바로 인공지능 영역의 경쟁으로, 그것은 다시 로봇이나 무인자동차, 에너지나 바이오산업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경쟁 영역이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의 모멘텀이 생성되는 곳이라면 회사든 국가든 합종연횡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에 과거의 친원관계는 현재의 판단 기준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기 어렵다. 상호협력 분위기와 비교우위 경제 이론 체계 속에서 한 세대 남짓 WTO 출범과 함께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글로벌 자유무역 물결은 이제 모든 국가에게 있어 불확실성 영역에 있는 구세대의유물이 되며 썰물이 되고 있다. 첨단 기술을 확보한 기업은 규제를 피해 보조금이나 세제, 인프라 혜택을 찾아 각국 정부의 산업 정책을 비교하며 마치 쇼핑하듯 국경을 넘나 들며 투자의 선수를 두려 한다.
국제 정세뿐만이 아니다. 날로 고조되는 기후위기와 그로 인해 더욱 강도가 세지는 기후 재난 역시 국가 간 산업 경쟁의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비교적 예측 가능했던 기후 하에서는 기본적인 농림축산, 수산업 같은 1차 산업의 안정적 운영이 가능했지만, 기후변동으로 인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는 영역은 작물, 수산물, 축산물 등의 생육과 수확에 의존하는 식량산업이다. 또한 탈산소 발전원으로의 전환은 에너지 집약도가 높은 제조업들의 이전과 변환을 점점 가속시키는데, 이로 인해 신재생에너지 기반 전력과 송배전 시설이 충분히 확보된 지역이 곧 다음 세대의 제조업 기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식량과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중요한 산업 영역이지만, 이 두 영역 모두 기후위기로 인해 점차 불확실성의 한가운데로 접어들고 있다. 기후위기는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거시적 변화에 해당하고, 글로벌 기술 경쟁은 인공지능에 의해 비가역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다중 불확실성이 주는 환경적 변화는 기업들의 산업 중심 이동은 물론, 그를 둘러싼 각국 정부의 산업 정책의 공격적 전환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핵심은 자국이 다른 나라 대비 더 큰 영향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에 있다. 산업 시대 이후 그 중심에 있는 것은 혁신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이다. 그렇다면 다중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회사와 나라들의 경쟁이 극한으로 치닫는 현시점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린치핀 전략은 바로 이 혁신의 경쟁 구도에서 대체 불가능한 지위로 가는 방법론을 찾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국이 블루오션 전략을 취해야 한다든지 특정 기술에 대한 독점적 지위로 올라가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럴 수 있는 기술이 있고 블루오션을 인위적으로 만들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글로벌 공급망은 독점적 지위를 갖는 집단이 장구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특히 그 집단이 국가일 경우에는 다른 나라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는 것은 예견할 수 있는 결과다.
기술적 맥락에서 본다면 이 국가적 스케일의 린치핀 전략은 각 산업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병목 지점에 영향력 지분을 갖는 것부터 시작한다. 물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병목 지점의 핵심은 그 지점을 지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갈 수 없는 관문을 의미하므로, 그 관문을 지킬 수 있는 실력을 가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다. 한 가지 주목할 특징은 이러한 병목 지점들은 각기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스케일과 분야에 걸쳐 병목 지점을 파악하고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이러한 전략은 개별 산업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산업 간의 연계 구조, 공급망, 기술의 분기와 발전 양상, 표준과 로드맵 등의 요소를 고려하여 수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1) 인공지능, 반도체 사업에서 핵심과제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전 세계 주요 회사들은 물론 선진국들의 첨예한 관심사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 안전성 규제 정책도 일부 핵심 어젠다가 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주요 관심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불가역적 영향에 쏠려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듯, 이제는 인공지능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낼 영향에는 이른바 챗지피티 ChatGPT 같은 일명 파운데이션 AI와 그것이 이른바 슈퍼인공지능 AGI이 될 것인지 여부, 그리고 인공지능이 새롭게 창출할 시장과 나아가 인공지능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현재의 산업 전체가 겪게 될 변화 등이 포함된다. 현재의 인공지능 산업의 중심에는 미국의 IT 대기업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구글(알파벳), 메타(페이스북), 아마존, MS, 테슬라 같은 미국의 주요 IT 대기업들은 더 큰 스케일의 파라미터 공간에서 정의되는 더 강력한 인공지능 알고리듬을 만들고, 이를 훈련시켜 더 효과적인 정보를 찾고, 더 빠르게 처리하고, 더 풍부하게 생성하고, 더 정확하게 예측하는 영역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가지려 경쟁한다.
잘 훈련된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대규모 클라우드 시스템과 서버에서 SaaS(software-as-a-service)나 추론 기능에 특화된 인공지능 서비스의 핵심 엔진이 된다. 예를 들어 구글이 지배하던 웹 검색 시장을 빠르게 대체하며 최근 점점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모으고 있는 앤쓰로픽Anthropic의 인공지능 검색엔진인 퍼플렉시티 Perplexity는 대표적인 거대언어모델 LLM 기반 추론형 인공지능 기반 검색 전문 SaaS다. LLM 기반 파운데이션 AI를 다음 세대의 정보기반 서비스 산업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병목 지점으로 본다면, 그 지점을 선점한 기업들은 오픈AI, MS, 알파벳, 메타, 앤쓰로픽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더 개선된 성능의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에 내놓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회사는 극소수다. 집중된 자본력과 높은 성처럼 쌓인 기술력으로 인공지능 산업 전체의 진행 방향이 결정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기업들은 인공지능 산업의 최전선에 있는 병목 지점이 된다.
2) 정보처리 전용으로 최적화된 하드웨어
그런데 한 층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진짜 병목 지점은 고성능 인공지능 정보처리 전용으로 최적화된 하드웨어에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제는 전 세계 시가총액 1위를 놓고 다툴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해진 미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의 GPU가 있다. 엔비디아의 GPU는 약 20여 년 전만 해도 주로 고성능 컴퓨터 게임용 가속 엔진 정도로 활용되었으나, 2010년대 초반, 머신러닝 machine learning 방법론의 무게중심이 딥러닝 deep learning으로 옮겨간 이후 그 지위가 급격히 격상되었다. 딥러닝에 필요한 합성곱 convolution 같이 대규모 행렬 반복 연산에 특화된 하드웨어로서 성능이 널리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엔비디아의 GPU는 본격적으로 인공지능 시대의 하드웨어 최전선에 자리 잡게 되었다.
엔비디아의 GPU는 하드웨어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최적화된 정보 전송, 처리, 버퍼, 메모리 버스 등의 시스템온칩 system-on-chip 설계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산 성능이 월등히 뛰어나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엔비디아가 제공하는 CUDA 같은 사용자 중심 GPU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 2.5D 패키징에 기반한 칩렛 설계 최적화 등의 기술에 기반한 경쟁력마저도 종합적으로 글로벌 탑 수준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다른 반도체 회사 제품으로 대체하기 매우 어려운 칩이 되었다. 이로 인해 GPU 시장에서 2위권으로 볼 수 있는 AMD가 제조하는 GPU는 점유율만 놓고 보자면 5%가 채 되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인공지능 전용 하드웨어 시장은 사실상 엔비디아 독점 체제로 굳어지고 있다. 실제로 주요 IT 대기업을 포함하여, 현재 인공지능 서비스를 하겠다는 기업들의 실제 실력이나 서비스 능력은 그들이 보유한 엔비디아의 인공지능 서버용 GPU칩의 보유 개수로 판가름될 정도다. 이 기준으로만 따진다면 예를 들어, 메타와 MS가 15만 대 보유로 최정상 그룹에 속하고, 알파벳과 아마존, 오라클 등이 5만 대 보유로 2위 그룹에 위치한다.
한국은 2024년 하반기 기준, 국가 전체를 통틀어도 기업, 학교, 정부기관이 보유한 서버급 인공지능 전용 GPU칩이 총 3천 대가 안 되는 것으로 조사된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한국은 안타깝게도 현재로서는 인공지능 산업에서는 이미 병목 지점 선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사실은 엔비디아가 아무리 GPU를 많이 만들어도 현재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세는 엔비디아의 공급 한계를 훨씬 초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엔비디아의 GPU는 인공지능 산업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병목 지점으로 볼 수 있고, GPU의 보유 규모는 그 자체로 신규 진입자 입장에서는 마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3) 반도체 엔비디아와 파운드리 TSMC
그러나 다시 한 층 더 들어가 보면, 이 병목 지점에는 더 핵심적인 병목 지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엔비디아가 반도체 기업이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팹리스 fabless 기업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더 잘 이해된다. 엔비디아는 고성능 인공지능 전용 GPU를 설계하고 이 칩을 활용하여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최적화된 알고리즘을 지원할 수 있는 핵심 설계 자산과 CUDA 같은 인터페이스를 보유하고 있으나, 그 설계대로 제작될 반도체 소자가 집적된 웨이퍼를 직접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 생산은 현재 대만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세계 최정상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담당한다.
엔비디아는 지난 10년 간 TSMC가 주기적으로 계속 발전시켜 온 선단 공정에 자사가 설계한 칩의 생산을 위탁하는 주요 고객 중 하나였다. TSMC는 2015년 세계 최초로 테크노드 10 나노벽을 돌파한 이후, 2018년 7 나노, 2020년 5 나노, 2022년 3 나노, 2024년 2 나노 순으로 선단 공정의 기술력을 지속적으로 높여 왔다. 줄어드는 노드 나노미터의 숫자는 그만큼 더 작은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2차원 평면 위에서 형성되는 핀펫 FINFET 같은 트랜지스터 구조를 생각할 때, 그 집적도는 줄어드는 길이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증가한다. 예를 들어 2015년 10 나노 공정에 비해, 2020년 5 나노 공정은 이론적으로는 4배 증가한 트랜지스터 집적 밀도가 달성됨을 의미한다.
TSMC가 발표한 최근 계획대로라면 2026년 1.8 나노, 2028년 1.6 나노벽을 돌파하게 되는데, 1.6 나노와 10 나노의 트랜지스터 집적도 차이는 거의 40배까지 늘어난다. TSMC의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집적 밀도 스케일의 향상을 이끌어 온 공정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파운드리 전문 기업으로서 다양한 칩 구성 요소를 결합하여 하나의 칩으로 만들 수 있는 설계-공정 최적화 기술 DTCO (Design-Technology Co-Optimization), 특히 월 수십만 장 이상의 12인치 웨이퍼를 높은 수율로 양산하는 과정을 통해 칩렛 집적 기술력을 확보한 것도 TSMC를 대체불가능한 파운드리 기업으로 만들어준 요인이 되었다. 2024년 기준, TSMC의 제1 고객은 애플이고, 제2 고객은 엔비디아인데, 두 회사가 TSMC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40%에 육박한다.
애플의 M시리즈 애플실리콘 Apple Silicon 칩은 인텔이나 AMD의 CPU보다 훨씬 전력대 성능비(전성비)가 뛰어나고,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AP로서도 가장 최적화된 칩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아이폰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갖는 압도적인 경쟁력의 밑바탕이 된다. 즉, 현재 모바일부터 초대형 인공지능 GPU 서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정보처리 성능이 뛰어난 첨단 반도체 칩 제조라는 병목 지점은 TSMC가 사실상 독점적으로 선점했다고 볼 수 있다.
TSMC는 단순히 선단 공정 기술 경쟁력뿐만 아니라, 이른바 후공정이라고도 불리는 첨단 패키징 Advanced Packaging 공정 기술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예를 들어 엔비디아의 GPU는 TSMC가 제공하는 CoWoS(Chip-on-Wafer-on-Substrate) 같은 패키징 기술로 비로소 하나의 시스템으로 완성되는데, 이 과정에서 TSMC가 제공하는 패키징 공정은 고성능 정보 처리 과정에서 생기는 발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관리 소재, 유전체 신소재, 메모리 모듈과 연결되어 안정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실리콘 인터포져Silicon interposer 등이 집약된 종합 공정 기술이다.
전공정과 후공정 모두 세계 최정상급 기술 경쟁력과 양산 규모를 동시에 갖춘 TSMC를 현재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해 TSMC는 현재 7 나노 이하급 최선단 공정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80% 이상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의 로드맵 대로라면 2 나노 이하, 심지어 옹스트롬(0.1 나노) 수준으로 접어드는 최선단 공정에서는 TSMC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일각에서는 이 점유율이 90%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이는 TSMC를 보유한 대만 입장에서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기제가 된다. 전쟁이나 대지진 같은 급변 사태 발생 시, 대만 발 첨단 반도체 공급망이 붕괴될 경우, 이는 전 세계 IT 공급망의 붕괴, 나아가 전 세계 혁신 엔진 붕괴로 도미노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주요 국가들에게 잠재적인 경제 불안 요소가 된다. 이로 인해 한 편으로는 대만 주변 지역 안보를 위해 자국의 군사력을 투사해야 한다는 압력이 생기고, 또 한 편으로는 대만에 과하게 의존하는 첨단 반도체 제조 쏠림 현상을 완화하려는 정책이 추진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랜드연구소나 CSIS 같은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한국 등에 TSMC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를 분산 조성하는 전략도 구상하는 전략 아이디어를 미국 정가와 정부에 제공한다.
사실 인공지능 전용 하드웨어는 엔비디아가 설계하고 TSMC가 제조하는 GPU만으로만 작동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컴퓨팅 하드웨어 아키텍처인 폰노이만 von Neumann 구조에서는 산술논리연산을 담당하는 코어 ALU와 데이터가 저장된 메모리 셀이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긴밀하게 연결되며 작동하는 방식을 따른다. 다만 코어의 동작 속도에 비해, 메모리는 그 원리상 속도가 느린데, 이는 데이터의 입출력, 대기, 전처리, 전송 등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는 메모리장벽 Memory Wall이라고 불리는 구조적 문제다. 이 문제는 코어와 메모리 사이의 속도 격차가 점차 확대되면서 더 심각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GPU의 성능이 아무리 강력해져도 결국 전반적인 정보 처리 속도가 메모리 소자 성능에 의해 결정되는 병목 지점이 생긴다.
엔비디아는 이 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추고자 더 전송속도가 빠르고 더 많은 데이터를 한꺼번에 입출력하며 제어할 수 있는 획기적인 구조의 맞춤형 메모리를 주문했고, 이에 타이밍 맞춰 대응한 업체는 한국의 SK 하이닉스다. 하이닉스는 2010년대 초반부터 HBM1, HBM2 같은 고대역폭메모리 HBM를 DRAM 기반으로 제조하기 시작하였으며, 노하우가 충분히 쌓인 2010년대 중반 이후 HBM3, HBM3E 등으로 세대가 진화하면서 엔비디아의 GPU와 연결될 수 있는 인공지능 맞춤형 메모리 주력 파트너사가 되었다. 현 5세대 HBM3E의 경우 하이닉스의 글로벌 점유율은 현재 55% 이상이며, 2025년의 HBM3E 점유율은 65% 이상, 그리고 2026년 이후 본격화될 6세대 HBM4의 경우 점유율은 8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HBM3E는 물론 HBM4의 최대 구매 대상자가 바로 엔비디아이기 때문이다 (HBM3E 구매 비중 2025년 75%, HBM4 구매 비중 2026년 80% 예상).
엔비디아가 인공지능 전용 GPU 시장에서 보유한 압도적인 점유율만큼은 아니지만, 인공지능 특화 하드웨어의 한 축으로 작동하는 병목 지점을 하이닉스가 거의 독점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기술 방식이 지속되는 한, 하이닉스가 가진 HBM 최적화 기술, 특히 더 고층으로 적층하고 더 많은 입출력 채널 밀도를 높임으로써 밴드폭을 확장하는 메모리 제조 기술 경쟁력은 하이닉스가 인공지능 반도체 제조의 병목 지점에서의 영향력을 더 크게 점유할 수 있게 만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여전히 메모리 작동 속도로 브레이크가 걸리는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결국 더 강력하고 새로운 인공지능 전용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한 기술 혁신 압력을 증가될 것이므로 이러한 영향력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3. 독점 상태의 인공지능 산업
지금까지 알아보았듯, 현재의 인공지능 산업이라는 거대한 전장에는 복수의 층위에 걸쳐 여러 병목 지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병목 지점들은 하나같이 압도적인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하여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소수의 기업이 선점한 상태다. 이러한 병목 지점의 특징은 다른 기술로 대체가 당분간 불가능한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신규 경쟁 업체들의 진입이 쉽지 않고, 다른 층위의 기술에 비해 다소 발전이 느리거나 기술 개발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마치 그 병목 지점을 중심으로 교통체증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한다는 점이다.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공지능 특화 반도체 제조의 린치핀이 된 TSMC나 SK 하이닉스가 점유하는 병목 지점의 더욱 아래 단계에 있는 핵심 공정 장비도 그러한 교통체증의 일부가 된다.
예를 들어 전공정에서는 10 나노 이하급 테크노드 패터닝 필수 장비가 된 네덜란드의 ASML가 독점 제조하는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가 있고, 실리콘관통전극tsv 같은 미세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pplied Materials나 램리서치LAM research 같은 소수의 장비 업체들이 독과점하며 제조하는 고성능 에칭 장비가 필요하다. 교통체증이 지속되면 도로 폭을 넓히거나 자동화된 시스템을 도입하고 새로 도로를 구축하거나 실시간 도로를 감시하는 자원이 투입되며 체증을 해결하려 하는 것처럼, 기술의 교통체증 역시, 체증을 일으키는 병목 지점의 개선을 위해 끊임없는 혁신이 시도된다. 특히, 그 과정에서 이른바 와해성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라 불리는 혁신의 맹아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씨앗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전에는 병목 지점에 자리 잡은 핵심 기술을 점유한 회사나 국가는 그 분야에서 영향력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분야에 혁신을 이어주는 지렛대가 되기도 한다. 이는 병목 지점에서의 핵심 기술 보유 여부가 린치핀이 될 수 있느냐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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