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와 메타의 수석과학자이자 인공지능(AI) 분야의 거물로 불리는 얀 르쿤이 X(옛 트위터)에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오픈AI는 GPT-4 후속 모델 개발에 나섰고 이는 ‘범용 인공지능(AGI)’으로 가는 길이라는 발표를 했습니다. 최근 AI의 안전을 담당하던 팀을 해체한 것으로 알려진 오픈AI는 세간의 여러 우려를 의식하기 때문인지 ‘안전·보안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 구글이 최근 공개한 AI 검색서비스 ‘오버뷰’는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답을 내놓으면서 미국 언론으로부터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발표가 많다 보니, 그에 대한 분석, 평가도 쏟아집니다. 이 과정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점심 먹고 오면 새로운 뉴스, 반박이 뒤따릅니다. 너무 정신이 없습니다.
이번 주 정신없이 일하고, 테크 기업의 움직임을 쫓던 중 두통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피치 드롭 실험’이 떠올랐습니다. ‘느리디 느린 과학’의 세계를 잠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1. 100년을 기다린 실험
1927년, 호주 퀸즈랜드대 최초의 물리학 교수 토마스 파넬이 재미있는 실험 장치를 만듭니다. 석유 정제 과정에서는 ‘피치’라는 딱딱한 물질이 생성됩니다. 도로를 만들 때 쓰는 ‘아스팔트’가 피치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이 피치는 점성이 매우 높은 ‘유체’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파넬 교수는 구멍이 뚫린 깔때기에 피치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피치가 아래로 떨어지도록 놔둡니다.
피치를 가열한 뒤 깔때기에 넣었는데, 가라앉는 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깔때기에 피치가 자리를 잡은 게 1930년, 그로부터 8년 뒤인 1938년. 첫 번째 피치 방울이 깔때기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후 7~9년에 한 번씩 피치 방울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파넬에 이어 두 번째로 피치 드롭 실험을 맡게 된 존 메인스톤 교수는 1984년, ‘타르(피치)의 점성이 물보다 2,500억 배 크다’라는 내용이 담긴 논문 ‘The Pitch drop experiment’를 발표합니다.
현재도 피치 실험은 진행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떨어진 게 2014년 4월입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만큼 곧 떨어질 듯합니다. 역사적인 장면을 목격하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공교롭게도, 아직까지 피치가 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없습니다. 2000년 11월, 피치 방울이 떨어졌지만 정전이 발생해 녹화되지 못했습니다. 피치 실험을 맡았던 과학자들 역시 공교롭게도 떨어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메인스톤 교수가 1970년 4월, 피치가 떨어질 것 같아 금요일, 토요일 이틀 밤을 꼬박 새웠지만 관찰하지 못했고, 결국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일요일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출근했더니 떨어져 있었다는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1988년에는 잠시 커피를 마시러 간 사이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메인스톤 교수는 2013년에 목숨을 잃었는데, 9번째 피치 방울은 2014년도에 떨어집니다.
피치 드롭 실험은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실험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습니다. 벌써 100년이 다 되어갑니다, 피치 드롭 실험을 통해 인류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피치가 떨어지는 속도는 호주 대륙이 맨틀의 대류로 움직이는 속도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고체로 보이는 ‘아스팔트’가 실은 천천히 흐르는 액체라는 점이 실험을 통해서 증명됐습니다. 3대를 이어 피치 실험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점성이 높은 물질이 분리되는 원리가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수십 년의 연구를 통해서 이 역시 밝혀질 것입니다.
2. 400년을 이어온 기록
태양의 표면에는 온도가 다소 낮은 ‘흑점’이 있습니다. 과거 이 흑점은 ‘미스터리’였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흑점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흑점 관찰은 무려 400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61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됐는데요, 200년 뒤인 1848년, 스위스 천문학자 루돌프 볼프가 200여 년간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울프 흑점 숫자(WSN, Wolf Sunspot Number)’라고 불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2011년에는 벨기에 왕립관측소가 1700년 이후 500여 명의 과학자가 관찰한 태양표면 사진을 분석한 뒤 태양의 흑점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백 년의 기록을 기반으로 이제 과학자들은 흑점이 11년이라는 주기를 가지고 변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흑점은 태양표면보다 온도가 낮습니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의 불균형이 생기면서 폭발이 일어납니다.
태양의 흑점에서 폭발이 발생하면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들이 우주로 방출되면서 ‘태양 폭풍(태양풍)’이 발생합니다. 태양풍이 지구로 향하면 지구 자기장이 순간적으로 교란되면서 전자장비가 오작동되고 인공위성이 고장이 나기도 합니다.
400년간 쌓인 데이터를 통해 과학자들은 흑점이 지구의 기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밝혀내기도 합니다.
이 데이터는 또한 태양의 활동 변화를 추적하고 예측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아마추어 관측가를 포함해 매월 90여 명의 사람이 흑점을 관찰한 뒤 이를 벨기에 왕립관측소에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3.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연구
서기 79년, 폼페이를 삼킨 베수비오 화산.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1841년, 베수비오 화산에 천문대를 짓고 지진, 화산을 관찰해오고 있습니다. 1856년, 베수비오 천문대는 수은을 이용한 지진계를 개발해 화산과 지진을 보다 정밀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합니다.
또한 20세기 초에는 지진학자 주세페 메르칼리가 ‘메르칼리 진도’를 만들고 이는 현재 지진의 규모를 측정하는 척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도 베수비오 천문대에서는 화산, 지진과 관련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4.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을 연구하는 프로젝트
역사가 오래된 연구만 ‘느린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포유류 가운데 가장 느린 동물은 바로 ‘나무늘보’입니다. 6,400만 년 전부터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식지 감소, 기후변화 등으로 생존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나무늘보는 하루에 약 36m를 이동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수목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 볼일을 봅니다. 워낙 느리게 움직이다 보니 나무늘보의 행동, 생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 나무늘보를 관찰하는 연구가 2017년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나무늘보를 관찰하기 위해 무선 목걸이, GPS 배낭을 달아 어떻게 이동하는지, 행동반경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연구하는 최초의 시도라고 합니다. 2022년 보도에 따르면 나무늘보의 배설물을 탐지할 수 있도록 개를 훈련한 뒤, 이를 기반으로 종의 경계, 개체수 증감, 어떤 보존 조치가 효과가 있을지 등을 파악해 나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느린 과학(slow science)’이라는 용어는 과학철학에서도 쓰입니다. 기술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요즘, 기술이 불러올 영향, 사회적 파장 등을 충분히 논의하면서 발전시켜 나가는 과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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