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느 생태계에 살고 있나요? 생태계(Ecosystem)라는 말. 생물학의 한 용어에서 시작되어서 지금은 ‘테크’에서 더 많이 쓰이고 있는 단어인 것 같은데요. 요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테크 생태계’를 선택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스마트폰을 아이폰을 쓸지, 아님 갤럭시를 쓸지를 정하는 거죠. 이건 마치 종교와 같아서 하나의 스마트폰 생태계에 들어가면 다른 생태계로 옮겨가는 것은 개종을 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되어가고 있어요.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요? 당연히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생태계를 유지하는 ‘애플’ 덕분이죠. 사실 모든 테크 기술을 독점적으로 시작합니다. 표준 혹은 플랫폼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보통 하나의 기술적 표준이 우위를 점하게 되면 네트워크현상에 따라 80% 이상을 한 기업이 장악하게 되고, ‘서드파티’라는 이름으로 플랫폼 위에 다양한 기업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90년대 PC 시장이 대표적인데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인텔 CPU라는 강력한 표준 플랫폼이 만들어진 후에는 PC를 조립하는 다양한 OEM 기업, 엔비디아 같은 보조 하드웨어를 만드는 기업, 이 생태계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들이 치열하게 활동했습니다.
물론 이때도 ‘애플’의 폐쇄적인 생태계는 존재했는데요. 애플은 윈도우+인텔 생태계와는 별도의 자신들의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PC시장에 비하면 니치마켓이었기 때문에 존재감은 크지 않았습니다.
1. 너 아이폰써 갤럭시 써?
하지만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시장은 크게 '아이폰 생태계'와 구글이 이끄는 '안드로이드 생태계'의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PC 시장처럼 한 플랫폼이 압도적으로 강해지거나, 두 플랫폼이 적당히 개방된 상태에서 경쟁했다면 지금 같은 생태계간 경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애플이 모든 것을 내부화시켜 직접 하면서,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속하는 기업들도 애플과 같은 라인업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안드로이드 생태계는 PC에서처럼 구글이 OS를 만들 뿐, 스마트폰 제조사, 스마트폰용 반도체 제조사가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제조사에서는 삼성전자가 가장 많은 안드로이드 폰을 판매하고 있는데요. 삼성전자가 첫 안드로이드폰을 내놓은 것이 2009년. 그때부터 구글과 삼성전자는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협력을 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각자 살림을 꾸리는 독특한 관계를 만들어 왔어요.
반면 애플은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여기에 들어가는 반도체까지 직접 만들고 있어요. 애플워치나 에어팟 같은 주변기기도 스스로 만들고 있죠. 아이폰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애플이 만든 인터넷 브라우저(사파리)와 클라우드 저장소(아이클라우드)도 쓰게 됩니다.
애플 생태계에 비해 안드로이드 생태계가 약한 또 다른 부분은 PC. PC 생태계는 여전히 윈도우 중심이거든요. 구글은 크롬북이라는 랩탑 PC를 내놓기도 했지만 존재감이 크지 않습니다.
2. 구글은 왜 픽셀폰을 만들었을까?
물론 구글도 강점이 있습니다. 지메일이라는 막강한 메일서비스를 중심으로 구글 드라이브, 구글 캘린더, 구글 워크스페이스 등이 유기적으로 얽혀있죠. 또한, 웹 브라우저 시장 1위인 크롬도 구글이 갖고 있는 엄청난 플랫폼입니다. 그런데 삼성전자 갤럭시 폰을 쓴다고 구글 드라이브나 구글 워크스페이스를 쓰는 건 아니기 때문에 애플처럼 막강한 영향력은 발휘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구글은 자체 제작하는 스마트폰의 판매량이 많지 않다는 약점이 있는데요. 구글은 2016년 처음 자체 브랜드인 픽셀폰을 내놨고, 지금은 애플 생태계와 동일하게 스마트폰에서 시작해 이어버드, 워치, 태블릿까지 판매하고 있어요.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주요 국가에 픽셀폰과 픽셀폰 생태계 제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구글은 왜 직접 스마트폰을 내놨을까요? 삼성전자와 경쟁해서 시장을 빼앗기 위해서?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애플의 생태계가 점점 강화되면서 삼성전자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움직임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점차 사람들은 처음 선택한 스마트폰의 생태계에 락인되고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특히 젊은 사람들일수록 안드로이드 생태계보다는 애플 생태계를 선호하죠(미국 한국 공통현상입니다). 이 생태계 싸움은 스마트폰에서 시작됐지만 태블릿과 PC로도 확장됐고, 헤드셋형 컴퓨터(XR디바이스)까지도 확장되고 있어요.
삼성전자는 하드웨어를 제조하고 혁신하는 능력은 '넘사벽' 급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소프트웨어를 집어넣고 생태계를 만드는 점은 구글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OS와 데이터 모두 구글이 갖고 있기 때문이죠.
구글이 삼성을 제대로 뛰게 만들기 위한 ‘러닝메이트’로 픽셀을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하기 위한 모범사례가 픽셀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실제로 모범사례를 픽셀폰이 보여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3. 애플 생태계를 관통하는 AI
애플의 인공지능을 뜻하는 애플 인텔리전스. WWDC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것 알고 계시죠? 애플 인텔리전스와 시리는 아이폰뿐만 아니라 맥, 아이패드에서도 작동됩니다. 시리는 이 기기들에서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정보들에 접근 가능해요. 예를 들어 메일이라던지 일정과 같은 것 말이죠. 이를 기반으로 개인 맞춤형 AI비서를 만들어준다는 것이 애플의 설명.
저는 이번 WWDC에서 애플의 키노트에 나온 것 외에도 애플 인텔리전스 데모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는데요. 생성형AI가 글을 고쳐주거나 이미지를 생성해 주는 기능은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챗GPT나 제미나이로 많이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온디바이스에서 작동되는 애플AI는 성능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애플이 제시한 시리의 모습은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내가 요청한 대로 일정을 자동으로 내 캘린더에 넣어주거나, 내가 주고받은 메시지를 바탕으로 질문에 응답해 주는 것은 '진짜 되면 쓸만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플이라면 만들 수 있겠지? 이렇게 AI에이전트를 만드는 것은 AI를 만드는 모든 기업들의 '꿈'과 같은 것이었고,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고 이미지도 인식하는 생성형AI가 등장하면서 이것이 훨씬 현실에 가까워졌어요.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요. 하나는 개인의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오픈AI나 구글 같은 회사가 내 데이터를 학습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반감이 크거든요. 두 번째는 AI가 단순히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스마트폰의 앱을 실행시켜야 하는데, 이는 결국 단말 디바이스를 만드는 회사들과의 협력이 필요했어요.
애플은 '개인정보'를 잘 보호한다는 고객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데다가, 엄청난 숫자의 단말 디바이스를 보유한 회사. 애플 생태계 안에 고객의 데이터를 갖고 있어요. 즉, 애플은 WWDC를 통해서 생태계 전체를 통하는 ‘지능’으로 AI가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선언한 것이에요. 내가 아이폰에서 한 얘기를 시리가 기억하고, 아이패드나 맥에서도 이를 기억해 답변을 내린다는 것이죠. 새로운 시리는 단순히 음성으로만 대화를 하는 비서가 아니라 텍스트와 이미지를 모두 이해하는 멀티모달 비서예요. 멀티모달 비서는 기존의 음성비서인 시리에 비해 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좋아질 것으로 보여요.
4. 삼성전자와 구글, '따로' 또 '같이'
애플 외에도 이것을 할 수 있는 회사가 있습니다. 바로 구글과 삼성전자. 두 회사는 구글 어시스턴트와 빅스비라는 음성 비서를 서비스하고 있는데요. 빅스비도 이미 음성으로 일정을 추가한다던지, 이메일을 읽어준다던지 하는 것이 가능해요. 하지만 챗GPT 처럼 생성형AI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똑똑하지가 않아요. 또한, 캘린더, 이메일 등과도 효과적인 인터랙션은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애플이 생태계를 관통하는 ‘인공지능’을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안드로이드 생태계도 이런 방향으로 이미 출발했어요. 최근 구글은 디바이스와 OS를 생태계를 통합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어요. 핵심은 AI를 중심으로 디바이스와 안드로이드 OS를 하나로 합치는 것. 이 부문의 임원으로 새롭게 취임한 릭 오스터로는 4월 노태문 삼성전자 MX부장(사장)과 만나기도 했어요. 삼성전자는 북미 조직을 개편하고 애플에서 시리를 만들었던 임원을 영입하기도 했습니다. 두 회사는 이번에도 힘을 합쳐서 애플 생태계와 경쟁해야 하는데요.
만약 구글의 픽셀폰이 지금의 삼성전자 휴대전화만큼 팔리고, 크롬북이 PC만큼 팔린다면 안드로이드 생태계는 애플 생태계를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 AI를 중심에 두는 회사로 변하고 있는 구글에게 'AI에이전트'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영역. 또한, 구글의 핵심비즈니스를 위해서는 단말 디바이스 경쟁에서 애플에게 밀려서는 안 됩니다.
한편 삼성전자는 애플처럼 자체 온디바이스AI를 만들기는 했지만, 서버에서 돌아가는 AI나 뛰어난 성능의 AI는 구글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천하의 애플이 결국 챗GPT를 도입한 것처럼 말이죠. 삼성전자가 애플처럼 '프라이빗 클라우드'를 만들 계획이 없다면 클라우드 자원에서는 구글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다만 애플이 챗GPT와 계약을 했던 것처럼 구글 제미나이도 아이폰에 탑재시키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은 두 생태계간 경쟁에서 중요한 변수예요. 사실 애플의 사파리 검색에 구글이 기본으로 탑재돼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스마트폰 생태계를 두고 경쟁하는 애플과 구글이 AI모델에서는 갑을 관계가 되는 것이 묘한 관계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아이폰 시리에 제미나이가 들어가면 되면 갤럭시 빅스비에는 챗GPT가 탑재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이렇게 돈다면 AI 생태계 싸움이라는 건 모델의 성능 경쟁이 아니라, 생태계에 어떻게 AI를 효과적으로 통합시키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디바이스와 서버의 하이브리드 컴퓨팅, 고객 데이터 보안, 그리고 마케팅(!). 스마트폰이 결국 평범한 소비자들에게 어필해야 하는 제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
애플의 폐쇄적인 생태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결국 미 법무부는 애플을 반독점 혐의로 제소하기도 했습니다. 애플은 EU에서도 엄청난 규제의 철퇴를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애플이 과연 독점회사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저는 아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의 애플 생태계가 좀 더 개방적이었다면 소비자들에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생태계로 전환하는 비용을 낮추고, USB-C 케이블이나 RCS 문자메시지 같은 요소에 대해서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것은 2011년. 현 CEO인 팀 쿡의 다음 CEO가 누가 될 것인가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어요. 애플이라는 회사도 더 이상 스티브 잡스의 생각과 시대에 머무르는 회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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