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정리하는 게 익숙해진 저는 이번에도 정리해보려 합니다. 바로 올 한 해 있었던 주요 과학기술 성과예요. 학술지 ‘네이처’는 얼마 전 올해의 인물 10명을 선정해 발표했습니다.
사이언스는 금요일 오전 4시 ‘올해의 혁신적인 성과’ 10개를 선정해 발표했어요. 이를 토대로 과연 제가 지난번 정리했던 ‘2000~2023년 과학기술 트렌드’와 올해의 성과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살펴봤습니다.
네이처 메디신의 발표도 정리했는데요, 네이처 메디신은 내년에 기대되는 임상 11개를 선정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질병을 정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어디까지 왔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연말이 되면 빼놓을 수 없는 한 해의 성과 정리, 빠르게 시작해 보겠습니다.
1. 올해의 혁신적인 과학기술 성과
사이언스가 선정한 혁신성과 10, 지난번 2000~2023년 트렌드로 살펴본 것과 상당히 유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최근 주요 과학기술 성과 트렌드는 바이오 분야의 경우 기초과학에서 응용과학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인다고 말씀드렸어요. 특정 질병과 관련한 신약 개발 임상이나 관련 성과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올해 사이언스가 선정한 1순위 성과 역시 신약 개발이었습니다.
바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치료제인 ‘레나카파비르’ 임상이 올해 가장 혁신적인 성과로 꼽혔습니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이 HIV에 감염이 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효과적인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 사이언스가 개발한 레나카파비르라는 약물이 HIV 예방에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레나카파비르는 이미 2022년 HIV 치료제로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았는데요, 올해 예방 효과를 확인하는 임상에서도 훌륭한 결과를 냈습니다.
이 약물은 HIV가 가진 특정한 단백질에 결합, 이 바이러스가 인간의 세포 핵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6개월마다 1회 주사하는 방식으로 투여되는데요, 다른 약물과 비교했을 때 투여 간격이 길고 효과가 좋아 환자 편의성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아프리카에서 진행된 대규모 임상에서 무려 ‘100% 예방 효과’를 입증하는 뛰어난 성과를 기록했고, 4개 대륙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임상에서도 99.9%의 예방 효과를 확인합니다.
아시다시피 HIV는 이제 ‘만성질환’과 같은 질병이 됐습니다. 1996년 약물 칵테일 요법(여러 약물을 혼합)을 통해 HIV가 우리 몸에서 억제하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음이 확인되었거든요. 이후 HIV를 예방하는 치료제도 출시됐고요.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나라, 소외 계층에게 있어서 HIV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나카파비르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어요.
HIV는 결국 에이즈(AIDS)라는 질병으로 연결됩니다. 현재 에이즈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전 세계에서 연간 63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2004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인데요, 따라서 유엔 에이즈계획(UNAIDS)은 “전염병을 종식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왔다”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관건은 가격이에요. 현재 레나카파비르의 비용은 연간 약 5000만원이 넘어요(치료제로 활용 시). 만약 예방 약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고, 복제약 생산이 가능해지면 연간 약 5만 원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해요. 완벽한 백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HIV에 대한 정복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1) HIV 예방,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는 CAR-T 치료법도 혁신적인 성과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CAR-T 치료제는 기존에 암 치료에 주로 활용됐습니다(15년 전 혈액암 치료로 시작). 환자의 몸에서 면역세포를 추출한 뒤, 유전자를 변형시켜 암세포를 공격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암세포를 파괴해요. CAR-T 치료제는 자가면역질환, 즉 면역계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질병에도 활용할 수 있음이 알려지고 난 뒤 다양한 임상이 진행되고 있어요.
역시 면역세포를 추출한 뒤, 유전자 변형을 통해 자가면역질환의 원인이 되는 B세포를 제거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몸에 넣어요. 독일에서 진행된 임상에서 루프스 환자 15명 중 CAR-T 치료를 한 8명이 완치됐다고 해요. 나머지 환자 모두 기존에 복용하던 면역 관련 치료제를 더 이상 복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임상 초기로 볼 수 있지만 효과가 확인된 만큼 향후 CAR-T 치료제는 다양한 치료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어요. 물론 가격을 낮춰야겠지만요. 일반적으로 1회 치료 비용은 약 4000~6000만 원 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구, 인류와 관련된 기초과학 성과들도 포함됐습니다. 맨틀이 소용돌이 형태의 대류를 발생시키고, 이것이 고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연구와 함께 중국에서 발견된 16억 년 전 살았던 다세포 생물 화석 발견이 10대 성과에 포함됐습니다. 고대 인류의 유골과 치아에서 추출한 DNA를 분석해 고대 사회 구조를 밝히는 연구도요.
이와 함께 ‘신물질’ 분야에서는 ‘알터마그넷’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자석 발견, 해양 조류에서 질소를 고정하는 세포 구조의 발견 등이 눈에 띕니다. 우주 관련 연구에 있어서는 제임스웹의 성과가 역시나 포함됐고, 향후 인류의 우주 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스타십 발사 성공’도 10대 성과로 이름을 올렸어요.
2. 네이처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 10
네이처는 사이언스와 달리 올해 주목할만한 인물을 10명을 선정합니다. 지난해 챗GPT가 ‘네이처 10’에 포함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올해 역시 AI 관련 인물이 포함됐습니다. 바로 구글 딥마인드의 레미 람 연구원이에요. 레미 람은 AI 기상예보 AI인 ‘젠캐스트(Gencast)’ 개발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날씨 예보는 슈퍼컴퓨터를 이용합니다. 온도, 습도와 같은 데이터를 모두 넣어 두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날씨를 예측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데이터를 물리 방정식에 넣어 기상 상태를 계산합니다. 이 과정은 엄청난 양의 연산을 해야 하는 만큼 고가의 슈퍼컴퓨터가 필요해요.
반면 젠캐스트는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합니다. 과거 기상 데이터를 학습해 변수 간의 연관성을 파악하고 미래의 기상 상황을 ‘추론’하는 거죠. 젠캐스트는 데이터를 학습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학습을 하고 나면 슈퍼컴퓨터 대비 빠른 예보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젠캐스트는 여러 측면에서 기존의 물리 기반 예보보다 더 뛰어난 결과를 보입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처럼 날씨 변화가 심한 지역에서는 슈퍼컴퓨터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슈퍼컴퓨터는 계산이 나오기까지 몇 시간이 걸리니까요. 레미 람은 최근 새로운 모델을 발표했는데, 단 8분 만에 기존 예보보다 정확한 15일 치 예보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네이처 올해의 인물에서 또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중국의 ‘과학 굴기’입니다. 10명 중 2명이 중국 과학자였거든요. 1명은 리춘라이 국가항천국(CNSA) 박사로 중국의 달 탐사선 창어6호가 달 뒷면의 시료를 채취하고 귀환했을 때 이를 분석한 과학자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 과학자들은 달의 뒷면에서 42~28억 년 전까지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발표합니다. 또 한 명의 과학자는 쉬후지 중국 칭화대 교수예요.
쉬후지 교수의 성과는 사이언스가 선정한 자가면역질환 CAR-T 치료제 보다 한 단계 나아간 성과를 제시합니다. 기존 CAR-T 치료제가 환자의 몸에서 추출한 T세포의 유전자를 변형한다면, 쉬후지 교수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추출한 T세포를 변형시켜 범용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열었거든요. 유전자 치료제라는 게 비싼 이유가 환자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형 치료제이기 때문인데요, 만약 이처럼 ‘범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다면 가격을 빠르게 낮추는 게 가능해집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되고요.
이밖에 초정밀 원자시계를 개발한 독일의 과학자 에케하르트 페이크 박사, 우주 팽창 속도에 관한 새로운 연구를 내놓은 웬디 프리드만 시카고대 교수, 엠폭스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어 빠르게 확산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한 콩고공화국의 과학자 플라시데 음발라 등도 올해의 인물 10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네이처는 10대 인물에 ‘과학자’만 선정한 것은 아닙니다. 눈길을 끄는 사람은 스위스의 변호사 코델리아 베어예요. 지난 2007년, 유럽에서 폭염으로 많은 사망자가 있었고 특히 여성 노인이 폭염에 취약했음을 발견합니다. 이를 토대로 코델리아 베어는 소송을 시작합니다.
즉 나이가 든 여성들이 극심한 폭염에 사망할 확률이 높은데, 스위스 정부가 이를 잘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 법원에서는 패소했지만 유럽인권재판소에서 승소합니다. 가짜 논문, 표절 논문, 논문 공장을 폭로해 과학계의 부정행위 적발을 나선 안나 아발키나도 10대 인물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3. 2025년 기대되는 임상 11건
너무 올해 이야기만 한 듯합니다. 살짝 내년으로 넘어가 볼게요. ‘네이처 메디신’은 매년 다음 해에 기대되는 임상 시험을 선정해 발표하는데요, 이를 정리해 볼게요. 아마 내년도 바이오 시장의 트렌드를 엿볼 수 있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발표 역시 한국 시간으로 12일 밤 11시에 발표되는 내용입니다.
위에 표가 바로 내년에 기대되는 임상을 정리한 것인데요, 짧게 적어 볼게요. 먼저 ‘프리온 질환’ 치료입니다. 프리온? 뭐지? 뭐지? 들어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맞습니다. 한때 한국을 뜨겁게 달궜던 그 질환, 광우병과 관련된 내용이에요. 프리온 단백질로 발생하는 신경퇴행성 질환입니다. 프리온 단백질의 생성을 막는 임상이 내년 시작됩니다. 첫 임상 결과는 독성을 파악하는 작업인데, 결과는 내년 말쯤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까지 프리온 질병 치료제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띄는 임상은 AI를 이용한 자궁 경부암 스크리닝입니다.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이 임상은 챗봇을 이용해 자궁 경부암과 관련된 자가 검사를 집에서 할 수 있도록 하는 시험이라고 해요. 프랑스에서는 자궁경부암 검진 클리닉에서 검사받지 않은 여성의 검사 참여 빈도를 높이려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고 해요. 이 과정에서 AI 챗봇을 이용해 검사받지 않은 여성들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칸나비디올(CBD)’도 눈에 띕니다. 대마초 식물에서 발견되는 특정 성분인 CBD를 이용한 임상인데요. 이미 뇌전증 치료제로 활용되고 있는 CBD를 기반으로 조현병을 예방하는 임상 시험이 진행 중입니다. 청소년의 정신 건강을 위한 모바일 치료제도 보입니다. 케냐에서 진행되고 있는 임상인데요, 스마트폰으로 쉽게 내려받을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 청소들이 자신의 심리 상태를 자각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목표입니다. ‘부모’ 버전도 있는데요, 자녀의 발달 상황, 정신 건강을 이해해 부모와 자녀 간 안정적인 관계 유지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치료제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이 임상이 성공한다면 디지털 시장에서 관련 ‘앱(치료제라고 해야 할까요)’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마찬가지로 자폐 아동을 위한 모바일 학습 게임도 기대되는 임상에 포함됐습니다.
내년도 기대되는 임상을 개인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제는 ‘신약 임상’이라는 개념이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치료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에요. ‘디지털’ ‘AI’라는 개념이 신약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AI, 애플리케이션이 말 그대로 하나의 ‘치료제’가 되는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듯합니다.
과학기술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류가 과학기술에 투자하고 AI를 개발하는 이유, 어제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이 아닐까. ‘나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어제보다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라는 데는 대부분 동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소 거칠게 말하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인류의 지식을 넓히는 기초과학 성과도 결국 인간을 비롯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지구, 우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이는 결국 ‘인간’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 거예요. 인간을 잘 이해한다는 것, 결국 우리를 더 행복한 길로 인도하는 거죠. 신약 개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정복하지 못했던 수많은 질병을 정복해 가면서 인류의 걱정거리는 줄고 건강하고 즐겁게 삶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든 게 행복을 위해서인데, 오늘 하루는 왜 힘들까. 왜 매일매일 스트레스받으며 힘겹게 살고 있을까. AI를 비롯한 다양한 과학기술 성과에 감탄하고 열광하면서 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지 못할까.
그래서 말입니다. 오늘 하루는 행복해 보는 게 어떨까요. 후배가 있다면 실수해도 혼내지 말고, 선배의 꾸중을 한 귀로 흘려보고. 대학생이나 취업 준비생이라면 슬럼프가 왔다고 슬퍼하지 말고 하루 정도는 놀아보는 거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요. C레벨 임원이시라면, 오늘 하루쯤 멋지게 “일찍 퇴근하세요!”라며 직원들을 기쁘게 해 주면 어떨까요. 우리의 세상은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만큼, 개개인도 오늘 하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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