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널찍한 회의실에서 이사회나 주주총회가 열리는 장면이 나오곤 합니다. 여기에선 회사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주요 임원들의 앞날이 결정되는데요. 긴장감 넘치는 배경음악과 심각한 등장인물들의 표정은 지금이 절체절명의 순간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때 문득 궁금증이 하나 떠오릅니다.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실제 기업에서도 이런 일이 왕왕 일어날까요? 오늘은 기업지배구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소유냐 경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현대 기업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을 소유하는 것과 실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영역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는데요.
1) 오너(Owner)
소유자라는 단어 뜻 그대로, 회사의 주인입니다. 보통 기업을 설립한 창업자 거나 기업의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한 최대 주주를 오너라고 하는데요. 기업의 자본 지배권과 경영권을 보유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을 세운 오너가 실제 회사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죠. 삼성, 현대, SK, LG 등 오너 일가가 기업 전체를 지배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 CEO(Chief Executive Officer)·최고경영자
기업의 운영과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최고 의사 결정권자입니다. 기업의 지분이 하나도 없더라도 최고 결정권을 가지고 기업의 전략이나 장·단기 계획 등을 결정하는데요. 내부 승진을 통해 발탁되거나, 경영 능력과 경험이 뛰어난 사람을 회사 외부에서 초빙하기도 합니다. CEO 경영 체제에서는 CEO의 전문 지식과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업의 효율적 운영과 실적 향상이 기대되죠.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선 주로 오너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CEO를 둬서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합니다. 가령,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창업자이자 CEO였지만, 애플의 최대 주주는 아니었습니다.
2. 주인-대리인 문제
오너 경영 체제와 CEO 중심의 전문 경영인 체제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오너 경영 체제는 기업에 대한 주인 의식과 실제 소유권을 바탕으로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데요. 큰 규모의 사업이나 획기적인 결단이 필요한 사업에서 과감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역량이 부족한 자가 경영권을 잡거나, 경영권을 남용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죠. 오너 일가가 다른 주주들의 요구가 무시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면, 이를 악용해 기업 경영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오너들의 잘못된 경영 판단으로 오너 리스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반대로 전문 경영인 체제가 잘 자리 잡으면, 기업 구조의 투명성과 객관적 견제 장치의 확보라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대리인 문제에 빠지기도 쉬운데요. 전문 경영인은 엄밀히 따졌을 때 기업의 주인은 아니기 때문에, 주주의 최대 이익, 즉 기업의 전체 이익보다 자신의 최대 이익을 우선시할 가능성이 큽니다. 임기제로 선임되는 전문 경영인의 특성상, 자신의 임기 내에 최대 실적을 내기 위해 당장의 단기적 관점에만 치중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1) 회장, 사장, 오너, CEO?
한편,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흔히 회장, 부회장, 사장, 부사장 등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회사 내에서 부르는 명칭인 직함이지 실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직책과는 다릅니다. 회장이나 사장 같은 직함은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죠.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오너가 회장으로, CEO가 사장으로 있는 게 일반적입니다. 한편, 기업 규모가 큰 대기업은 사장 혼자서 경영을 맡기엔 한계가 있는데요. 이에 통상적으로 사장은 전문성이 필요한 경영을 담당하고 회장은 인수합병, 투자, 자산관리 같은 나머지 업무를 담당하곤 합니다. 명예회장은 보통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전직 회장을 가리키죠.
3. 주주의 대리인, 이사와 이사회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서 나타나는 주인-대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도 있습니다. 바로 이사회인데요. 이사회는 주주를 대신해 기업의 경영진을 감독합니다. 이사 중에서도 회사를 대표하는 지위의 대표이사는 법적으로 경영책임을 지는 기업의 실질적인 리더로 통합니다.
1) 이사회, 주식회사라면 필수
주식회사의 진정한 주인은 주주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주주 모두가 경영 일선에 참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주주들은 주주총회에서 자신을 대신해 기업의 경영을 이끌어 갈 사람을 선임하는데요. 이때 선임된 사람이 바로 이사입니다. 주식회사라면 반드시 3명 이상의 이사로 이루어진 이사회가 있어야 하고, 이사회에서는 주주총회에서 다뤄지는 사항 외 기업의 업무집행과 관련된 의사 결정이 이뤄지죠. 이사의 업무집행 감독과 자산의 처분 및 양도, 국내외 주요 투자, 지점의 설치·이전·폐지 등에 대한 결정 권한도 갖습니다.
4. 이사회와 주주총회, 그리고 감사위원회
주식회사는 이사회뿐만 아니라 주주총회, 감사위원회까지 총 3개의 기관을 갖춰야 합니다. 주주 전원으로 구성된 주주총회는 주식회사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데요. 정관의 변경, 주식 분할 결정 등을 비롯해 궁극적으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사를 선임 또는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경영진에 의해 소집되며, 일반 주주도 3%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주주총회를 열 수 있습니다.
감사위원회는 이사회 내에 포함된 위원회 중 하나며,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의 상장회사에 설치 의무가 있습니다. 이사회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상장회사는 이사회가 아닌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이사 중 감사위원회위원을 선임해야 하죠. 이때 감사위원은 3명 이상의 이사와 3분의 2 이상의 사외이사로 구성됩니다. 이외에도 위원 중 1명 이상은 회계 또는 재무 전문가여야 합니다.
1) 대표이사(Representative Director)
이사회 또는 주주총회에서 선임되는 대표이사는 대부분 CEO와 동일 인물이기 때문에, 사실상 CEO와 같은 의미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대표이사는 상법으로 규정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CEO와 구분되는데요. 대표이사는 대외적으로 회사를 대표하고, 회사 내부에서는 이사회나 주주총회에서 이뤄진 결정 사항을 실제로 집행합니다. 법적으로 업무 집행에 관한 권한이 보장된 만큼 회사의 위법 행위에 대한 막대한 책임도 져야 하죠. 대표이사는 인원에 제한이 없어 여러 명일 수 있고 꼭 CEO여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한 기업의 회장이나 사장이 대표이사를 맡는다면 ‘대표이사 회장’ 또는 ‘대표이사 사장’이라는 직함이 붙습니다. 실제로 현재 삼성전자의 대표이사는 한종희, 경계현 2명인데요.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 경계현 대표이사 사장으로 불립니다.
2) 이사회 의장(Chairman)
이사회의 리더, 이사회 의장은 대표이사를 비롯한 경영진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독합니다. 기업과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책임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견제하는 건데요. 이사회에서 선임되며 주로 이사회를 소집하고, 경영에 관한 주요 안건을 결정하며 이에 대한 집행을 감시합니다. 이 때문에 이사회 의장은 회사를 대표하는 대표이사와 다른 사람으로 두는 게 바람직하죠. 대표이사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기업의 객관적이고 장기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사회 의장은 창업자가 맡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배달의민족 창업자 김봉진, 쿠팡의 김범석 등이 대표적인데요. 이들은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의 전략이나 방향과 같은 큰 의사결정을 위해 의장직을 맡았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사회 의장의 역할이 흐려진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즉 경영진을 감독하고 견제해야 하는 이사회 의장이 실질적으로는 경영에 가담한다는 것이죠.
3) 등기이사·비등기이사
이사회의 이사는 크게 등기이사와 비등기이사로 나뉩니다. 등기이사와 비등기이사는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여부가 기준이 되는데요. 등기이사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됐으며 법적으로 등기를 마쳤다는 뜻이고, 비등기이사는 편의상 이사 직함만 붙었을 뿐 등기는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비등기이사는 이사의 업무를 수행하긴 하지만 이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법적인 권한과 책임을 갖지도 않습니다. 이사회에는 등기 서류에 이름이 올라간 등기이사만이 참여할 수 있죠. 흔히 전무이사, 상무이사 등으로 불리는 이사는 직함을 나타내는 말로, 실제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등기이사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등기이사의 임기는 법률상 3년 이내인데요. 비등기이사의 보수나 임기는 주주총회를 거치지 않고 회사 임의로 정할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선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해임 역시 대표이사의 재량에 달렸고, 이에 대한 상법상 손해배상청구는 불가능하죠. 만약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됐고 이사로 등기되기 위한 모든 요건을 갖췄으나 등기만 되지 않은 상태라면 법률상 이사가 됩니다. 등기이사도 비등기이사도 아니나 등기이사와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지죠.
4) 사내이사
한편, 등기이사는 세부적으로 사내이사, 사외이사, 비상무이사로 나뉘어집니다. 사내이사는 회사에 상주하며 회사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요. 실질적인 기업 경영에 관여하기 때문에 진짜 이사로 통합니다. 늘 회사에 출근하기 때문에 상임이사에 속하기도 합니다.
5) 사외이사
사외이사는 기업 경영진에 속하거나 기업의 업무를 수행하지도, 회사에 상주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사내이사와 동등한 법적 의무와 책임을 지니는데요. 기업 경영에 관한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을 때 이사회에 참석해 안건 표결에 참여합니다. 대주주와 기업 경영을 견제·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하죠. 가령, 대주주를 비롯해 임원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이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 임원의 가족은 사외이사가 될 수 없는 식입니다. 기업과 연관이 없는 교수나 변호사, 공인회계사, 언론인, 퇴직관료 등 외부 인사가 주로 선임됩니다.
6) 비상무이사
비상무이사는 사외이사처럼 회사에 상주하지도, 업무를 수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다는 점이 사외이사와 다른 점인데요. 비상무이사는 필요에 의해 자유롭게 선임되며, 주로 상장회사의 주요 주주 기업에서 이사회 경영 참여를 원할 때 선임됩니다.
5. 실제 사례로 살펴보는 기업지배구조 실전편
1) ’반쪽자리’ 회장?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삼성전자 회장으로 잘 알려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그런데 이재용 회장은 반쪽짜리 회장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삼성전자의 사내이사가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재용 회장은 2016년 10월 임시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의 하나인 사내이사로 선임된 적 있지만, 임기를 마친 2019년 이후 비등기이사에만 머물러야 했습니다. 국정농단 사태로 실형을 선고받아 등기이사에 오르지 못하는 취업제한이 걸렸고, 제한이 해제된 이후에도 삼성전자 불법 승계 혐의로 재판을 받으며 사법 리스크가 컸기 때문이죠. 재판에 연루된 채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내이사직에 오르는 건 큰 부담이 될 뿐 아니라 기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키운다는 이유였습니다. 지난 2월 초, 이재용 회장은 드디어 불법 승계에 관한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요. 여전히 사내이사 복귀 시점은 미정입니다. 검찰의 항소가 남은 만큼, 사내이사 선임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이죠. 이로써 국내 4대 그룹의 총수 중 이재용 회장만이 유일한 비등기이사라는 점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듯합니다.
2) HD현대그룹
HD현대그룹은 작년 말, 30년 만에 오너경영 체제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HD현대그룹은 정몽준 HD현대그룹 창업자가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1988년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전문경영인체제를 이어 왔습니다. 정몽준 창업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권오갑 회장이 회장직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경영 활동을 펼쳤죠. 그러다 작년 11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3세이자 정몽준 HD현대그룹 창업자의 장남인 정기선 HD현대그룹 사장이 부회장으로 초고속 승진하면서 다시 오너경영 체제에 시동이 걸렸습니다. 오너 경영을 본격화하면서 더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펼치고, 미래 먹거리를 비롯한 기업의 새로운 비전을 선보이기도 했죠. 이에 따라 오너경영 체제로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정기선 부회장이 HD현대그룹의 최대주주이자 부친인 정몽준 창업자의 지분율 26.0%를 물려받아야 합니다. 정기선 부회장의 HD현대그룹 지분율은 5.26%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3) 유한양행
반대로 모범적인 전문 경영인 체제를 운영해 온 것으로 유명한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제약 기업 유한양행인데요. 유한양행은 창업자 유일한 박사와 그의 측근인 연만희 고문만이 회장직을 수행했고, 1996년 이후로는 오너경영 없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쭉 이어 왔습니다. 이는 투명 경영을 원칙으로 삼은 유한양행만의 창립 정신이기도 했죠.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택함으로써 경영 권력의 집중을 막고, 회사 경영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려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 유한양행 주주총회에서 28년 만에 회장과 부회장직을 신설하고, 이사가 아닌 사람도 사장 또는 부사장으로 선임할 수 있다고 정관을 변경하는 안건이 통과돼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에 유 박사의 손녀이자 유일한 직계후손인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는 반대 의사를 표하기 위해 미국에서 귀국해 주주총회에 참석했죠. 본사 앞에서는 일부 직원이 특정인이 회장직에 오르기 위한 술수가 아니냐며 트럭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5일, 결국 회장직 신설 안건은 찬성률 95%로 가결됐습니다.
4) 사외이사=거수기?
오랜 시간 전문경영인 체제를 이어 오던 유한양행은 이사회를 중심으로 경영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사회 구성원도 사외이사가 사내이사보다 많고, 감사위원회를 둬 객관적인 경영이 이뤄지도록 했는데요.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담당하는 사외이사의 존재가 경영진의 횡포를 줄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사외이사 역할이 본래 목적대로 수행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작년 국내 주요 대기업에서 사외이사가 이사회 안건에 보류와 기권을 포함한 반대표를 던진 비중은 10%도 채 되지 않았는데요. 총수가 있는 기업 중 90%가 넘는 곳에서 사외이사는 이사회 안건에 100%의 찬성률을 보였습니다. 이에 억대 연봉을 받는 사외이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거수기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오죠. 작년 말 기준 삼성전자 사외이사의 1인당 평균 연봉은 2억 320만 원이었습니다. 이사회 한 번 참석에 2,540만 원을 받은 셈입니다.
재밌는 가십거리로 보이기 쉬운 기업지배구조가 끊임없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결국 주주 가치의 극대화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지배구조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는 주주 가치의 훼손으로 이어지죠. 더 나은 기업 경영을 위한 선택이 이뤄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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