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으로 국제 유가가 오르는 것은 물가 상승의 원인이 됩니다. 또한 물가 안정의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가상승은 당연히 전반적인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어떻게 유가가 오르는데 물가가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최근에 발표된 중요한 경제 지표는 미국의 8월 소비자 물가였습니다. 물가가 전년 동기 대비 3.7% 올랐습니다. 7월보다도, 그리고 시장의 예상보다도 높게 나온 겁니다. 그런데 유가를 제외한 다른 상품들의 가격은 7월보다, 그리고 시장의 예상보다 덜 올랐습니다. 요약하면 기름값은 오르고 있는데 기름을 제외한 다른 물품들의 가격은 예상보다 덜 오른다는 것입니다.
1. 유가상승으로 소비 지출 감소
그 이유는 소비자들이 기름을 사기 위해 자연스럽게 다른 지출을 줄이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들의 지갑에 여유 자금(저축)이 남아 있으면 기름값이 오르더라도 소비 지출을 줄이지 않지만, 여유분이 부족하면 유가상승이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짧아집니다. 실제로 지난해에도 유가는 러시아 전쟁 여파로 꽤 올랐지만, 유가상승이 미국 소비자들의 지출 감소로 이어지는 데는 4개월가량 걸렸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번 유가상승이 미국 소비자들의 지출 감소로 연결되는 데는 1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미국 소비자들의 초과 저축이 꽤 감소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8월 소비자물가가 발표되자 금융 시장에서는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이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판단하고 그 변화를 자산 가격에 조심스럽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국제 유가가 경기 흐름에 큰 변곡점이 됐던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표현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건도 국제 유가상승이 단초가 됐던 사건입니다. 국제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 고공행진을 지속하면서 미국의 소비자들이 소비를 줄이기 시작하다 결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이자를 갚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시작된 일입니다.
2. 일본에서도 회의론 제기
주요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뜨거운 경기를 경험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최근의 분위기 반전이 일시적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주가도 오르고 경제 성장률도 오르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엔저’로 인한 반사이익일 뿐 실제로 일본 경제가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국 화폐 가치가 하락하면 관광객도 늘어나고 수출도 잘 되고 기업 실적도 좋아지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상일 뿐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내수 소비가 살아나고 생산을 위한 설비 투자가 늘어나야 하는데 그런 조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본 기업들이 오랜만에 가격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소비자들이 기꺼이 그 가격을 지불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공급망 쇼크로 더 이상 가격 인상을 하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워 가격 인상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으로 소비자들이 그 가격을 계속 지불하면서 따라오느냐를 지켜봐야 할 문제라는 게 일본 경제 회의론의 핵심입니다.
3. 국제 유가가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
그런 우려가 실제 데이터로도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의 올해 GDP 성장률도 한국보다는 높겠지만 예상보다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습니다. 수치를 뜯어보면, 기업의 설비 투자는 전 분기 대비 오히려 감소했고 임금도 물가 상승률만큼 못 오르고 있습니다.
국제 유가상승이 인플레이션을 잡는 역설이 실제로 나타날지 아니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부추길지, 일본 경제의 상승세가 계속 이어질지 아닐지는 아직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운 질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믿고 있던 사실과 좀 다른 해석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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