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이필수 회장은 “14만 의사와 2만 의대생은 모든 수단 동원한 강력 투쟁에 들어가겠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의료계에서 정부에 던진 강력한 경고 메시지입니다. 전국 모든 의사와 의대생이 파업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기에 큰 파장을 낳았습니다. 의료계에서 이토록 강경한 발언이 나온 이유는 정부가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확대한다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매년 뽑는 의대생 숫자를 늘리겠다”는 것입니다. 의협은 정부가 의대 증원 방안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내놓는다면 위 엄포대로 투쟁에 나설 수 있단 입장입니다.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슈인 ‘의대 정원 확대’ 이슈를 알기 쉽게, 나름의 깊이로 정리했습니다.
1. 응급실 뺑뺑이 10건 중 3건, 정부 “의사 부족이 원인”
올해 5월 경기 용인에서 후진하던 차량에 70대 노인이 치이는 사고가 났습니다. 약 2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경을 헤매 당장 수술이 필요한 와중에도 받아주는 병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응급 상황에도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구급차 안에서 사망하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의 대표 사례입니다. 정부는 이 사태의 원인을 “의사가 없어서”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부나 언론 통계에 따르면 일리가 있습니다. 2018~2022년 119 구급대가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재이송한 건수는 3.7만 회에 달합니다. 재이송의 가장 많은 원인이 ‘마땅한 전문의가 없어서'(31.4%)로 꼽혔습니다. 다시 말해 응급실 뺑뺑이 10건 중 3건이 진료에 필요한 의사 수가 부족해 벌어졌단 겁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의사 수는 부족한 편입니다. 재작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6명(한의사 포함)입니다. OECD 평균(3.7명)의 70% 수준이자 최하위권에 속합니다. 의대 졸업생 수도 인구 10만 명당 7.26명으로 OECD 최하위권입니다. OECD 평균은 13.5명입니다.
2. 지방에선 의사 부족 더 심해, 소아청소년과 단 10% 충원
수도권도 문제지만 지방은 훨씬 심각합니다. 전국 총 9개의 지방거점국립대 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충원율은 아무리 비인기과에다 지방 기피까지 겹쳤다지만 단 10%에 그쳤습니다. 외과·응급의학과·산부인과 등 다른 필수 의료 분야도 의사 구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목포중앙병원은 2017년 정부가 지정하는 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가 됐지만 흉부외과 의사 채용 수 기준을 채우지 못해 작년 지정이 철회됐습니다. 울릉보건의료원은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등에서 수년째 담당 의사를 못 구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료 시스템이 좋은 서울로 환자가 몰리고 환자 부족으로 지방 병원이 붕괴하고 의사들도 수도권으로 향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부는 전체 의사 수를 늘려 이른바 ‘낙수 효과’를 유도하겠단 방침입니다.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리면 피부과, 성형외과 등 인기과들이 포화 지경에 이르러 외과·산부인과 등 필수 의료 분야에 지원자가 늘어날 거란 기대입니다. 병원 간 경쟁이 치열한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으로 향하는 의사도 늘 거란 기대도 있습니다.
국내 총 40개 의대 입학 정원은 2006년 이후 17년째 3058명으로 동결된 상태입니다. 정부가 이 동결을 풀고 의대 정원을 확대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3. 다른 나라도 정부가 의대 정원 조절할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학과별 정원 배정은 대학 자율의 권한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맘대로 정원을 늘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의사와 간호사, 교사 등 특수 직역은 정부가 모집 인원을 지정합니다. 현재 의대 입학 정원도 정부가 2000년 의약 분업을 시행하면서 정원 10% 감축안을 발표한 이후 단계적 감축을 거쳐 현재까지 유지됐습니다. 반면 간호대 입학 정원은 15년간 2배 늘렸고 2024학년도에도 700명을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나라도 의대 정원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의사 수가 부족해 의대 정원 숫자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 독일, 영국 등 선진국은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리는 추세입니다. 인구 규모가 한국과 비슷한 영국은 2020년 8,639명이던 정원을 2031년 1.5만 명까지 늘릴 방침입니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OECD 최상위권인 오스트리아와 노르웨이나 일본과 프랑스 등도 고령화 추세에 맞춰 의대 정원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습니다.
4. 한국도 재작년 정원 확대 추진, 그러나 의료계 반발로 없던 일
한국에서도 의대 정원을 늘리려던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20년 코로나 사태 때도 감염병 대응 인력 확충 등을 이유로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한 바 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매년 400명씩, 10년간 정원을 총 4000명 늘리고 호남권에 공공 의대를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공공 의대를 세워 교육비를 지원하는 대신 의료 열악 지역에서 10년간 의무 복무하도록 하는 방안이었습니다. 당시 의협 총파업, 전공의 집단 휴진, 의대생 국가고시 응시 거부 등 의료계 거센 반발에 무산됐습니다.
5. 정부 “연말까지 의협과 협의”
현재 정부의 구체적 계획은 “의대생 숫자를 늘리겠다”라는 방침으로 며칠 새 거듭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만, 의료계 반발을 의식해 증원 규모와 방식은 정하지 않고 구체적 로드맵 발표도 최대한 미루면서 연말까지 의협 등과 협의하겠단 입장입니다.
하지만 의료계 외에도 변수가 남아있긴 합니다. 바로 야당입니다. 야당도 의대 정원 확대에 공감대를 밝혔으나 지역 의사제 도입, 공공 의대 설치 등이 패키지로 묶여야 한다는 방침입니다.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19일 정부는 지역 의료 관련 종합 대책을 내놨습니다. 지방 국립대 병원의 역량 강화를 위해 필수 의료 분야 교수 정원을 대폭 늘리고 정원과 임금 규제 등을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6. 의협 “증원만이 해결책? 아냐!”
의료계 입장은 “정원 확대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현재의 문제는 ‘전체 의료 인력 부족’이 아니라 ‘필수 의료 인력 부족’과 ‘인력 배치의 문제’에 있다는 겁니다. 즉, 낙수 효과만 기대하는 것으론 이 2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대안으로 기피되는 진료 과목의 획기적인 처우 개선과 의료 수가 인상 등의 개선책이 필요하단 입장입니다.
나아가 의대 정원 확대의 결정적 근거로 제시되는 의사 수 부족에도 반박 논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의사 수 산정 기준이 국가별로 다르기에 OECD 통계만을 근거로 한국의 의사 수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미국·네덜란드·호주 등은 한국·일본과 달리 근무 시간까지 고려하는 방식으로 의사 인력을 집계합니다.
나아가 국토 면적 대비 의사 밀도로 보면, 한국이 OECD에서 3번째로 높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2017년 기준 국토 면적 대비 의사 밀도는 한국이 10㎢당 12.1명으로 네덜란드(14.8명), 이스라엘(13.2명)에 이어 3위입니다. 반면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가장 많은 오스트리아는 국토 면적 대비 의사 밀도가 5.44명으로 중위권에 그칩니다. 때문에 단순 통계만을 바탕으로 의사 수가 부족하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게 의협의 주장입니다.
나아가 정원을 늘리지 않아도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는 점차 증가할 거란 주장도 나옵니다. 활동 의사란 의사 면허가 있고, 현재 의사로 근무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의협은 2010~2020년 국내 활동 의사의 연평균 증가율이 2.84%로 OECD 평균(2.19%) 보다 높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7. 정원 늘면 N수생 폭증
한편 의료계 바깥에서도 의대 정원 확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옵니다. 특히 입시 관련 우려를 많이 제기합니다. 아직 구체적 방안이 발표된 건 아니지만 증원 규모는 매년 1000명 이상일 것으로 여타 언론에 거론됩니다. 전체 정원의 3분의 1이 늘어나는 셈입니다.
이에 의대를 노리는 N수생이 폭증하고 이공계의 의대로의 이탈이 심화할 거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수능부터 킬러 문항이 배제되면서 수능이 좀 더 쉬워질 전망이라 이와 맞물려 위 현상이 더욱 부추겨질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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