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Ecosystem)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업계는 아마도 ‘테크업계’인 것 같은데요. 이 생태계를 가장 잘 운영하는 회사들이 바로 미국의 빅테크 업체들입니다. 이런 생태계는 빅테크 기업들이 경쟁사들을 차단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품과 서비스를 낮은 가격에 제공한다고 해도 생태계가 막강하면 후발 주자들은 따라잡기가 어렵거든요.
오늘은 개발과는 무관한 문돌이가 실리콘밸리에서 지켜본 개발자 행사들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 행사의 나라 미국, 매주 Big 테크 행사가 열린다
미국에서는 거의 매주 한 번은 테크 관련 행사가 열립니다. 테크 산업이 크다 보니 관련된 기업들이 여는 자체 행사도 많고, 협회가 여는 업계 관계자들이 모이는 행사도 많습니다. 가장 많이 행사가 열리는 지역은 바로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입니다. 왜냐면 이곳에 가장 많은 테크기업들의 본사가 있고, 스타트업도 많이 있기 때문이죠. 당연히 이 지역에 개발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를 열기에 '딱'이죠.
테크기업들이 하는 행사는 크게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와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로 나눠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논문이 발표되는 ‘학회’ 성격의 행사도 많이 있습니다. 업계관계자들이 모이는 행사 중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것이 바로 CES인데요. 매년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고, 소비자 전자 제품을 만드는 회사, 이 회사들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들이 행사에 참여하죠.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만 모이는 행사, 고성능컴퓨터를 만드는 회사들이 모이는 행사, XR(확장현실) 업계 관계자들이 모이는 행사, 보안업계 관계자들이 모이는 행사, 게임 개발자와 회사들이 모이는 행사도 있습니다. 테크크런치와 같은 유력 언론사가 개최하는 행사도 있죠.
하지만 요즘 테크기업들은 업계 행사보다는 자체 행사에 더 많은 돈과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자체 행사에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발표할 수 있고, B2B 고객들과 만나서 관계를 다지는 영업활동도 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개발자’들을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죠. 테크 기업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고객이 아니라 ‘개발자’들이라는 인상을 저는 종종 받습니다.
2. 3대 개발자 행사, I/O BUILD WWDC
미국의 3대 개발자 행사. 어디일까요? 사실 공식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 행사를 참여해 본 제가 느끼기에는 매년 5월 개최되는 구글 I/O와 마이크로소프트 빌드, 6월 개최되는 애플 WWDC를 3대 개발자 행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전 세계에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는 디바이스에 들어가는 OS를 만드는 회사가 이 세 곳이기 때문에 이들이 여는 개발자 행사가 클 수밖에 없는 거죠.
마이크로소프트는 PC운영 체제인 윈도우, 클라우드 플랫폼인 애저를 운영하고 있고, 이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개발자 플랫폼을 운영 중입니다. 애플은 아이폰, 맥, 아이패드 같은 거대한 생태계를 운영하고 있죠. 구글도 안드로이드뿐만 아니라 크롬, 클라우드 컴푸팅. AI, TPU까지 정말 다양한 개발자 생태계를 갖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클라우드 부문은 별도로 B2B 행사인 ‘클라우드 넥스트’라는 행사를 열고 있어요.
AWS의 re:Invent(리인벤트), 메타의 커넥트, 엔비디아의 GTC 같은 행사들도 매우 크고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행사입니다. 리인벤트는 AWS를 기반으로 하는 개발자들의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클 수밖에 없고, 커넥트는 AR/VR 디바이스에서 메타가 가장 앞서있는 데다가, 최근에는 오픈소스 라마가 매우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어요.
엔비디아 GTC는 올해 들어 갑자기 뜨거워진 행사인데요. 그전부터 AI를 학습시키고 이를 GPU에서 작동시키는 일을 하는 개발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은 꼭 소프트웨어 개발자들만 하는 것은 아닌데요. 어도비의 경우 어도비 툴을 사용하는 디자이너, 크리에이터, 마케터들이 행사의 중심에 있습니다. 어도비와 유사한 피그마의 콘피그나 캔바의 크리에이트도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행사입니다.
1) 개발자만 모이는 것이 아니다
게임회사, 혹은 메타버스 회사로 알려져 있는 로블록스도 개발자 행사를 엽니다. 로블록스 내부의 체험(게암)을 만드는 전통적인 개발자 외에도 게임 속 아바타와 아이템을 만드는 이들도 개발자 생태계의 일부가 됩니다. ‘노션’도 올해 10월 첫 대면 컨퍼런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엽니다. 전 세계의 노션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행사죠.
새롭게 만들어진 기업들도 생태계 구축에 큰 신경을 씁니다. 오픈AI는 챗GPT 가 큰 성공을 거둔 후 2023년 바로 데브데이라는 개발자 행사를 열었는데요. 올해는 이를 미국, 런던, 싱가포르 세 곳에서 나눠서 개최합니다. 오픈AI의 API를 사용해서 서비스를 만드는 개발자들의 생태계 구축부터 나선 거죠.
실리콘밸리의 양대 데이터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터브릭스와 스노우플레이크의 행사는 매년 6월에 열리는데요. 이는 데이터 관련된 생태계도 크기 때문. 이런 B2B 중심의 기업들에게 컨퍼런스는 큰 B2B 고객과 만나는 중요한 이벤트이고, 그러다 보니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오라클, 서비스나우, 델, HPE, 시스코 같은 회사들이 매년 큰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2) 훌륭한 개발자는 플랫폼 성공의 비결
테크 기업들은 왜 개발자 행사를 여는 걸까요? 컴퓨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디바이스와 OS의 성공은 해당 플랫폼에서 얼마나 좋은 소프트웨어 개발자(=개발사)가 나오느냐에 달렸습니다.
초기 PC와 윈도우 시장의 성장을 이끈 것은 PC게임들이었고요. 아이폰과 안드로이드가 양대 스마트폰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개발자들이 이 두 곳에 정착했기 때문. 아무리 빅테크 기업들이 많은 우수한 인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외부 개발사들의 창의성과 열정을 따라오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개발자 행사는 기업과 개발자들 사이의 커뮤니티를 강화하고, 지식을 서로 나누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개발자 행사는 그 자체로 빅테크기업들의 새로운 서비스와 제품을 공개하는 자리가 됐습니다. 개발자 행사는 기본적으로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툴의 업그레이드를 발표하는 자리인데요. 애플이 2023년 WWDC에서 MR헤드셋인 비전 프로를 발표하고, 메타가 커넥트에서 스마트 안경 오라이언 데모를 공개한 것처럼 개발자 행사는 미래 제품에 대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자리가 됐습니다. 개발자들에게 공개하면서 대중에 함께 공개하는 것이죠. 빅테크 기업들의 개발자 행사는 실적발표 이상으로 그들의 주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행사가 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3. 삼성전자 SDC2024, 10년째 열고 있다고?
2024년 10월 3일 여기 실리콘밸리의 산호세 컨벤션 센터에서 삼성전자의 개발자 행사인 SDC(Samsung Developer Conference)가 열렸습니다. 2014년부터 열려서 무려 10회째라고 하는데요(코비드 기간 한번 skip 했다고). 이번에 처음 가본 저는 삼성이 무슨 개발자 컨퍼런스를 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삼성전자가 직접 운영하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씽스인데요. 스마트씽스는 이른바 사물인터넷(IoT) 플랫폼. 2014년 스마트씽스라는 스타트업을 인수한 이후 이를 스마트폰, TV, 가전 등 삼성제품 전반에 설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성제품만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업들의 전자제품도 연결한다고 해요. 테슬라, 이케아, 콜러, 경동나비엔 등이 대표적. 스마트싱스는 애플 아이폰 사용자도 설치해서 사용할 수 있고, 개방형 스마트홈 표준인 ‘매터’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개방적인 IoT 플랫폼 중 하나.
삼성전자의 스마트TV를 위한 OS인 타이젠, 보안 플랫폼인 녹스도 SDC에서 업데이트 내용을 항상 발표하고 있어요. 갤럭시 폰의 UI인 ‘One UI’가 처음 공개된 곳도 SDC로, One UI가 삼성제품 전반으로 확대된다는 발표도 이날 나왔습니다.
SDC는 빅테크기업들의 어마어마한 개발자 행사에 비하면 작은 규모의 행사입니다. 여러 가지로 아쉬운 부분들이 많았죠. 하지만 이런 개발자 행사를 10년째 열고 있다는 것만은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서 개발을 주도하는 임원들이 직접 참석하고, 무엇보다 ‘영어’로 발표를 합니다. 개발자들과 직접 만나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자리도 함께 열리죠.
삼성전자에 여성임원들이 이렇게 많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대에 많은 여성 분들이 올라오셨는데요. 소프트웨어 쪽이서서 상대적으로 여성분들이 제조 쪽보다 많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갤럭시 사용자로, One UI가 아이폰의 UI 이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를 만든 MX사업부의 정혜순 부사장님의 발표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4. TSMC의 최대 경쟁력은 반도체 생태계
세계 1위 반도체 생산 업체. 파운드리 업체인 TSMC인 것 알고 계시죠? TSMC는 최근 주가가 사상 최대치를 계속 넘으면서 미화 1조 달러에 근접해 가고 있습니다. TSMC는 애플, 엔비디아, 퀄컴, 미디어텍, 인텔 등 주요 테크기업들의 반도체를 위탁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죠.
TSMC는 2008년 'Open Innovation Platform(OIP)'이라는 생태계를 출범시키는데요. 웨이퍼를 만드는 TSMC를 정점으로 IP를 가지고 있는 회사, 설계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 등이 모여 공동으로 기술개발을 하고 고객들(=애플, 엔비디아, 퀄컴 등)의 요구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는 TSMC 파운드리가 가진 가장 장력한 경쟁력으로도 꼽힙니다. 점점 반도체의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생태계를 구축해 여러 기업들의 협력을 촉진하는 것이죠. 삼성전자도 SAFE(Samsung Advanced Foundry Ecosystem)라는 이름의 생태계를 2019년 출범시키기도 했습니다.
TSMC는 매년 전 세계에서 OIP 포럼을 개최하는데 북미에서도 지난달 포럼을 개최했습니다. SK하이닉스가 처음으로 이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죠.. 아쉽게도 저는 참석을 거절당해서 가볼 수 없었습니다.
플랫폼과 생태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배달 플랫폼에 참여하는 라이더나 식당과 안드로이드 앱 개발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어느 플랫폼이든 기본적으로는 플랫폼 참여자와 윈윈하는 상생을 목표로 합니다. 참여자가 성공하면 플랫폼도 성공하는 구조를 만들려고 하죠. 사실 이는 개발자 생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플랫폼과 생태계의 차이는 참여자들이 플랫폼 소유자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느 플랫폼/생태계이든 잘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죠. 그리고 플랫폼으로 돈을 버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들을 팬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플랫폼의 미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여자들을 하나의 생태계로 끌어들여 함께 성장하는 것(동반성장)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한국 기업도 빅테크 같은 글로벌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쉽지 않다고 봅니다. 일단 영어도 안 되고, 국내 시장도 크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한국의 개발자와 기업들이 이미 글로벌 생태계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우리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아니요. 한국에서 나온 것이 큰 시장을 만들어내고, 세계의 중심이 될지도 모르죠. K팝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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