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초 애플의 혼합현실(MR) 기기인 비전 프로의 출시를 앞두고 테크 업계는 기대에 넘쳤습니다. 마침내 애플이 이 시장에 진입하면서 MR기기의 대중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이었죠. 마침 2023년 9월 메타가 신형 MR기기 퀘스트3를 공개했고, 그해 말부터 판매를 시작하면서 퀘스트3와 비전 프로의 대결이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2월 비전 프로가 출시되고 반년이 지난 지금. 초기의 관심과 달리 비전 프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빠르게 잊혀지고 있습니다. 반사이익을 기대했던 메타 퀘스트3 도 큰 화제를 끌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1. 애플 비전 프로, 보릿자루가 되다
2월 판매를 시작한 애플 비전 프로. 초기의 관심은 뜨거웠지만 지금은 애플 스토어에 가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열광도 조회수를 노리는 유튜버들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나옵니다. 실제로 1분기와 2분기 10만 대씩을 판매했던 미국내 비전 프로 판매량은 3분기 4분기에는 2-3만 대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미국외 지역에서 판매가 시작된 3분기 4분기에는 다시 판매가 늘어나 연간 50만 대 정도로 시장분석기관은 보고 있어요. 당초 애플의 목표였던 100만 대에서 크게 후퇴한 셈.
반면 메타의 퀘스트3는 전작인 퀘스트2 만큼의 인기는 끌지 못했지만 그래도 지난해 출시 이후 전 세계에서 100만 대 이상을 판매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이 팔리는 것은 저렴한 이전 세대 모델인 퀘스트2라는 설명이 있을 정도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어째서 비전 프로는 잘 팔리지 않은 걸까요? 바로 높은 가격과 킬러 앱이 없기 때문. 특히 비전 프로는 높은 가격 때문에 보급대수 자체가 많지 않아서 개발사들이 소프트웨어를 만들 유인이 낮아요. 1000달러 이하의 저가 모델이 나오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해결될 수 없어 보입니다.
2. 1세대 제품은 거르는 것이 진리?
또, 막상 제품이 나오니 그전에 비해서는 알 수 없었던 단점들이 지적되고 있는데요.
1) 착용시 압박감과 무게감
비전 프로는 메타 퀘스트보다 가볍지만 싱글밴드 형태이기 때문에 무게가 분산되지 않고, 안면에 압박이 매우 커요. 그래서 퀘스트 보다 훨씬 일찍 피로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2) 좁은 시야각
MR헤드셋을 착용했을 때 기존의 시야를 얼마나 커버하는지를 시야각이라고 합니다. 비전 프로는 퀘스트3 보다도 시야각이 낮아서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3) 시력교정 문제
이건 제가 경험했던 것인데요. 비전 프로는 안경을 쓰고 착용할 수 없어서 시력검사를 통해서 별도의 도수가 있는 렌즈를 구매해서 부착시켜야 해요. 안 그래도 비싼 가격에 렌즈까지 사야 한다니.. MR기기 사용자의 다수가 남성들인데 남성 중에는 안경을 쓴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건 치명적인 단점 같아요. 이런 개인용 렌즈는 비전 프로를 가족과도 공유 못 하는 개인용 기기로 만들죠.
이런 점에서 비전 프로는 대중을 대상으로 만든 제품이 아니라 대중들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수집하고 다음 제품에 반영하기 위한 제품이라는 설명까지 나옵니다. 이는 애플워치의 사례에서 확인이 되었는데요. 초기에 애플워치는 형편없는 제품이었지만 세대를 거듭할 수록 기존 애플 생태계에 잘 편입이 되면서 지금은 머스트해브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격과 킬러앱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다음세대에서 편한 제품이 나온다고 해도 애플 MR기기는 성공하기 어려워보입니다.
3. XR전략을 수정한 1위 기업 메타
최근 메타는 XR기기 사업 전반(이른바 메타버스)을 담당하는 리얼리티 랩스를 대대적으로 구조조정 하고 있어요. 먼저 MR기기와 스마트 글라스를 분리했습니다. 지난 9월 커넥트에서 퀘스트3와 함께 스마트 글라스인 메타 레이밴 글라스 2세대를 선보였는데,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저에게도 스마트글라스는 매력적인 제품이었어요. 예상대로 퀘스트3 보다는 스마트글라스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보였고, 메타는 스마트글라스를 밀어주기로 한 것 같아요.
메타는 MR 전략도 바꿨습니다. 일단 퀘스트용으로 개발한 OS를 외부 기업에게도 개방. 어떤 기업이든 MR기기를 만들고 거기에 호라이즌OS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거죠. 애플이 VisionOS 생태계를 만들고, 구글도 안드로이드XR 이라는 생태계를 만들기 시작하자 OS 개방이라는 강수를 둔 것.
메타는 LG전자와 함께 만드는 것을 검토했던 하이엔드 제품을 만들지 않기로 했어요. 반대로 지금의 메타퀘스트3의 성능을 좀더 낮춘 보급형 제품을 출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는 9월25일 열리는 메타 커넥트에서는 그래서 신형 스마트 글라스와 메타 퀘스트3의 저가 제품을 공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4. 스마트 글라스가 답일까?
메타의 스마트 글라스는 XR기기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제품이에요. 아이웨어로 유명한 레이밴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촬영기능, 통화기능, 스피커 기능이 있는 안경을 만든 거죠. 그리고 여기에 멀티모달 능력이 있는 메타AI가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안경에 다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내가 보고 있는 이 꽃의 이름이 뭐지?"
메타 스마트 글라스는 기본적으로는 선글라스이지만 투명한 렌즈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일반 안경으로도 쓸 수 있어요. 하지만 디스플레이가 없기 때문에 XR기기라고 보기는 아직 이릅니다.
현재 시장에는 디스플레이가 있는 스마트 글라스가 이미 많이 나와있어요. 가장 유명한 것이 엑스리얼의 제품들이고, 비투어(VITURE)라는 회사의 것도 있어요. TCL의 레이 네오 에어라는 제품도 있죠(공교롭게도 대부분 중국회사 제품). 이 제품들은 휴대용 개인 디스플레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안경을 쓰면 눈앞에 커다란 스크린이 등장해요. 유리 위에 화상이 비치는 방식. 대부분 케이블을 통해서 스마트폰이나 게임기등과 연결해서 연결된 제품의 배터리를 사용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메타 스마트 글라스와는 컨셉이 다르고 MR기기와도 다르죠. 디스플레이로 쓰이고 있을 뿐 우리가 기대하는 증강현실 기기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요. 애플 비전 프로나 메타 퀘스트3 같은 혼합현실(MR)기기는 외부 카메라로 현실을 3D로 데이터로 구성한 후 이 위에 3D의 가상을 덮어씌우는 방식을 하고 있어요.
MR기기가 안경이 아니라 고글의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몰입감 있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를 완전히 차단시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감상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외부를 차단하는 몰입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5. MR헤드셋은 아이패드를 대체합니다
소비자 가전제품 시장에서 MR헤드셋는 '아이패드'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스마트폰이 기본적으로 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개인용 전자기기를 선택하게 되는데요.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랩탑이죠. 그다음은 태블릿PC, 그 다음은 콘솔게임기 정도.
MR헤드셋은 이미 스마트폰이나 랩탑이 있는 사람이 구매하는 세 번째나 네 번째 전자기기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사용성이 높아지면 장기적으로는 랩탑을 대체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먼 얘기.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 시청이나, 게임과 같은 용도에 가장 적합합니다. 비전 프로와 메타 퀘스트의 등장과 소비자들의 피드백을 통해 기업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 것 같아요.
① 가격은 매우 중요하다.
② 착용성(무게, 선의 유무)은 매우 중요하다.
③ 킬러앱은 아직 부족하다.
이런 이유로 XR기기는 다음의 세 가지 카테고리로 정리되고 있어요.
6. MR기기 최고앱은 고릴라 게임?
비전 프로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킬러서비스의 부재를 꼽았는데요. 지금도 애플 비전의 앱스토어에 들어가 보면 주로 영상 시청 앱들이 상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상들은 혼자서 즐기는 것이고, 그래서 생각보다 자주 사용하게 되지 않는다고 해요.
반면 메타 퀘스트의 경우 스토어에 들어가면 다양한 앱들이 있는데요. 특히 게임과 소셜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VR챗이나 비트세이버, 로블록스 같은 것이 대표적인 소셜요소가 강한 게임들. 소셜 게임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자꾸 사용하게 되죠.
현재 퀘스트 스토어 1위 게임인 고릴라 태그를 주목해 볼 만한데요. 이 게임은 원래 2021년 1인 개발자가 출시한 게임입니다. 출시 후 메타 스토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지금은 일간활성사용자(DAU)가 100만 명, 월간활성사용자(MAU)가 300만 명인 게임이 됐습니다. 1번이라도 플레이해 본 사람은 1,000만 명, 누적 매출은 1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비교를 위해 말씀드리자면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소셜게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로블록스의 DAU는 7,700만 명. 라이엇게임즈의 인기 FPS게임인 발로란트의 MAU는 2,000만 명 정도라고 해요.
7. 소셜과 커뮤니티가 성공비결
고릴라 태그는 게임 속에 하반신이 없는 고릴라가 돼서 양손만으로 벽이나 나무를 잡아서 높은 곳에 올라가는 비교적 단순한 게임이에요. 손가락이 아닌 두 팔을 쓰면서 게임을 하게 되는 MR디바이스의 강점을 살렸어요. 하지만 소셜 적인 요소가 강해서 친구들과 함께 플레이하거나, 게임 외의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죠. 이러다 보니 플레이어들의 평균 게임시간은 60분에 달한다고 합니다.
많이 언급했던 어메이즈VR. 어메이즈VR은 최근 K팝 남자아이돌인 ‘투머로우바이투게더(TXT)’의 VR콘서트 투어를 시작했어요. 어메이즈VR은 VR헤드셋을 쓰고 볼 수 있는 몰입형 콘서트 콘텐츠를 만드는 곳인데 VR콘서트는 극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본다는 것이 특징. 나처럼 TXT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보기 때문에 진짜 콘서트에 와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VR기기와 가장 먼 수요층이라고도 볼 수 있는 여성들을 고객으로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요. TXT 콘서트는 한국에서 마치고 미국에서 진행중고 일본에서도 시작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비전 프로와 메타 퀘스트3는 망한 걸까요? 일단 비전 프로는 망했습니다. 저는 망할 것 같았고.. 실제로 망했습니다. 하지만 애플은 다음 세대에는 틀림없이 저렴하고 착용이 편한 모델을 내놓을 것 같습니다.
메타 퀘스트3는 망한걸까요? 퀘스트2에 비교한 다면 망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규모의 생태계를 구축한 것은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얼마나 좋은 게임이나 앱이 나오느냐에 달렸는데요. 고릴라태그나 VR챗, 어메이즈VR 같은 앱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앞으로 더 놀랄만한 것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
빠르면 올해 공개될 수도 있는 삼성전자와 구글이 협력한 MR헤드셋(혹은 스마트글라스?). 비전 프로의 실패요인들이 반영된 제품이 나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만큼 한국 소비자들이 가장 접근이 용이한 제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MR헤드셋은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PC나 태블릿 PC, 게임기를 대체할 순 있죠. 일단 그 정도에 눈높이를 맞춰서 미래를 준비한다면 언젠가 공간컴퓨팅의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애플의 첫 휴대용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뉴턴이 나온 것이 1993년. 이것이 본격적인 대규모 제품으로 팔리기 시작하는 데는 15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MR디바이스의 아이폰 모먼트가 찾아오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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