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네덜란드의 한 회사에서 경영 실적을 발표한 뒤, 세계 반도체 불황에 대한 불안감이 급격히 확산하고 있어요. 반도체 생산용 첨단 장비를 만드는 ‘ASML’이라는 회사인데, 이 기업의 실적이 좀 부진했다는 이유로 한국이나 일본의 반도체 회사 주식이 줄줄이 하락세를 면치 못했어요.
주가가 계속 급락세인 것도 아니고 이후 흐름도 여전히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번 실적 발표는 국내 언론에서 ‘ASML 쇼크’로 부를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안 그래도 반도체 시장이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던 참에, 반도체 시장 진짜 불황을 보여주는 지표가 등장했기 때문이에요.
1.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지난 15일(현지시간) ASML은 올해 3분기 경영 실적 보고서를 회사 공식 웹사이트에 게시했어요. 보고서에 따르면 ASML의 3분기 장비 수주 계약 금액은 26억 유로(약 3조 8,600억 원)였고, 전문가들의 예상 금액인 53억 9000만 유로(약 8조 원)의 절반도 되지 않았어요. 함께 공개된 내년 매출 전망도 기존보다 훨씬 줄어든 수치였어요.
보고서가 공개된 직후 유럽 주식시장에서 ASML의 주가는 16% 이상 급락했어요. 1998년 6월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이었대요. 즉각 극적인 반응이 나타난 거죠. 그도 그럴 것이, 이 발표는 회사 측의 실수로 예정보다 하루 먼저 발표됐어요. 원래 기업들은 실적 발표 날짜를 예고하고 해당 일정을 지키는데, 이번에 ASML은 예정보다 하루 일찍 웹사이트에 보고서를 올렸어요.
ASML은 실수를 알아채고 급히 보고서를 삭제했지만, 이미 내용이 일파만파 퍼져나간 뒤였어요.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훨씬 좋지 못한 데다, 예정보다 일찍 유출돼 버린 실적 탓에 투자자들은 더욱 극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어요. ASML의 부진이 알려진 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는 대부분 하락세를 보였어요.
2. ASML, 그렇게 중요한 회사야?
ASML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첨단 장비를 만드는 회사예요. 직접 반도체를 만들진 않지만, 생산용 장비를 만들어서 삼성전자 같은 반도체 제조회사에 파는 곳인 거죠. 반도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면, ASML의 장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어요.
반도체를 만들 땐 먼저 설계도에 있는 회로 모양대로 ‘웨이퍼’라고 부르는 평평한 판 위에 빛을 쏴요. 빛에 노출된 판에는 일종의 밑그림이 그려져요. 이때 밑그림이 그려진 부분 외에 나머지 부분을 깎아내면 회로 모양만 남게 되고, 이게 바로 반도체가 돼요.
반도체는 이 과정에서 회로의 폭을 미세하게 만들수록 성능이 좋아져요. 관건은 설계도를 세밀하게 그리고, 이 설계도대로 정확히 만드는 기술력이에요. 앞서 언급했던 ‘밑그림 그리기’에는 여러 종류의 빛을 사용하는데요. ASML은 특수한 빛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장비를 만들어요. 이 특수한 빛을 사용하면 극도로 세밀하게 만든 설계도대로 밑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하고, 성능 좋은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게 되죠. 바로 이 ASML의 장비를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라고 불러요. 세계에서 유일하게 ASML만 만들 수 있어요.
이 장비는 한 대에 수천억 원에 달하는 데다 만들기도 어려워요. 많아 봤자 1년에 50대 정도만 만들 수 있대요. 만들기 어려운 만큼 장비를 확보하기 위한 반도체 회사 간의 경쟁도 꽤 치열하다고 해요. 그래서 ASML은 언론에서 ‘슈퍼 을’이라는 별명도 얻었어요. 보통은 물건을 사는 고객이 갑이고 판매자가 을이지만, ASML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에요.
3. 왜 실적이 안 좋은 건데?
이렇게 주요 반도체 기업이 모두 ASML의 장비를 사용할 만큼 영향력 있는 회사이다 보니, ASML의 실적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흐름을 전망해 볼 수 있는 지표로 많이 활용돼요. ASML의 장비가 불티나게 팔리면 앞으로 호황일 가능성이 큰 거고, 반대라면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신규 투자를 줄인다는 뜻이니까 불황을 예상할 수 있겠죠.
실적 발표 후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반도체 시장 회복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점진적이고, 고객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라고 밝혔어요. 인공지능(AI) 분야에서는 반도체가 정말 잘 팔리고 있지만, 스마트폰과 컴퓨터 등 다른 분야에서는 수요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모양 새래요.
실제로 AI용 반도체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엔비디아나 엔비디아와 동맹 관계인 TSMC 등을 제외하면, 많은 세계적 반도체 기업이 줄줄이 투자를 줄이고 있어요.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투자를 줄였고, 인텔도 독일에서 팹(Fab‧반도체 제조시설) 설립을 연기했죠.
물론 ASML의 실적에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 관련 제품 수출을 통제하고 있는 것도 영향을 줬어요. 중국에 주요 제품을 수출하지 못하게 하는 통에 ASML의 매출에서 중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확 줄어들고 있다고 해요.
4. 그래도 AI 미래는 밝다?
ASML의 실적 발표 이후 급락세를 보였던 세계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회복세예요. 전문가들은 ‘AI용 반도체 성장세는 여전하다’는 이유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고요. 다른 반도체는 안 팔리지만, AI 반도체 수요가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니 크게 문제없다는 견해예요.
반도체 분야 컨설팅 기업인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트래티지스(IBS)에 따르면 AI용 반도체 시장은 올해 99%, 내년엔 74% 성장할 전망이에요. 이 성장세에 힘입어 반도체 시장 전체는 올해 18%, 내년에 12% 성장할 것으로 보인대요. 결국 한쪽에서는 ‘반도체 불황’을 이야기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크게 보면 불황이 아니라 호황’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거예요.
확실히 반도체 시장도 AI 분야에서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전쟁터가 된 것 같아요. 앞으로는 같은 반도체 회사라도 AI용 제품을 팔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회사의 명운이 갈릴 테니까요.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과연 이 혼란한 시기를 지나며 승자로 기록될 주인공은 어떤 기업일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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