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의 흐름을 구성하는 3층의 레이어
세계가 굴러가는 모양새를 이해하는 데는 3층의 레이어가 있습니다. 가장 밑에는 천년이 가도 바뀌지 않을 지리, 그 위에는 사람 그리고 이들 위를 종잡을 수 없는 '운'이 덮고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변하지만 결국은 이 세 가지를 붙잡고 가야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운은 뉴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필 1995년에 한신 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살아나나 했던 일본이 엔고를 맞지 않았다면, 2000년 선거에서 플로리다 재검표가 이뤄져 엘 고어가 대통령이 돼 이라크 전쟁이 없었다면,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고르고 고른 인물이 시진핑이 아니었다면 등과 같이 갈대 같은 운의 향방은 뉴스의 주요 소재입니다.
지리는 수백 년간 온 세계를 누빈 서구 제국들이 갈고닦아놨습니다. 열대의 땅부터 양 극점까지 뒤지고 다니며 돈이 될 구석과 착취할 기회를 엿본 결과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해양-대륙 세력이라는 가상의 힘도 구상하고 또 나라마다 타고난 '팔자'인 지리를 정리하며 판세를 읽었습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낀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인지 능력의 한계가 있을뿐더러 누구나 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집값 얘기할 때 결국은 감정싸움이 되는 건 누구나 포지션이 있어서입니다. 무주택자는 숏, 유주택자는 롱. 집도 이럴진대 사람, 민족 그것도 전 세계에 대해 평가하긴 더 어렵습니다.
2.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의 눈으로 본 세계
이런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이가 있으니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입니다. 단지 캠브리지 나온 똑똑한 사람이라 혹은 거의 모든 주요국 정상을 만나본 이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싱가포르란 나라가 이런 일을 하기에 최적입니다. 지도에서 싱가포르에 컴퍼스를 찍어서 한 바퀴 돌리면 동남아부터 유럽, 중동, 호주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닿습니다.
세계의 배꼽이란 말이 어울릴 이 나라를 30여 년이나 통치하며 섬마을에서 일류 도시로 만든 사람이 세계를 촌평한 모음집이 <리콴유의 눈으로 본 세계>입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거의 모든 대륙, 국가의 속내와 고민을 통찰할 수 있는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 싶다. 거인이라 할 만합니다.
중국을 시작으로 주요국이 모두 들어가 있는데, 가장 많이 할애한 게 중국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은 일부러 그러나 싶을 만큼 리콴유가 해선 안 된다고 하는 짓만 골라하고 있습니다. 책이 2013년에 쓰였는데, 리콴유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중국엔 희망이 없다고 단언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짚을 건, 그는 중국에 매우 호의적이며 미래를 낙관했습니다. 그는 1978년 덩샤오핑을 만나서 '우리보다 중국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린 중국 남부의 땅 없는 농민의 자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에는 많은 학자와 과학자, 그리고 전문가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개혁개방을 하기도 전, 가난하던 중국에 보낸 찬사입니다.
그런데 그의 합리적인 혹은 희망적인 전망은 족족 빗나갔다. 그의 사후 일입니다.
"중국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이 조용하게 힘을 기르고 영향력을 키워나가되 '두목' 같은 행세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과, 결국에는 몸집을 키워 모든 국가를 위협할 것이라 는 입장입니다. 내 생각에 그들은 전자를 택할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중국은 전랑외교의 결과 주변국에 '두목'은커녕 '깡패'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국력이 강해졌다고 해서 기분이 들떠 권력을 휘두르고 할 시진핑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는 그런 국가운영이 중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매우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제 생각에 시진핑은 주변국이 경계심을 갖지 않도록 조용히 힘을 키워나가는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전략을 이어갈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은 '중국몽'을 국시로 내걸고 중화제국 부흥을 선언했습니다.
"저렴한 노동력의 도움으로 중국은 당분간 고성장을 계속 누릴 것입니다. 서부 지역의 충분한 노동력이 뒷받침되어 앞으로 15년, 20년은 7~9%의 성장을 이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노동력 고갈은 빨랐고, 5%대 성장률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중국은 젊은이들에게 옛 영광을 되찾은 조국에 대해 굉장한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너무 그러 다 보니 일본에 대한 항의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그것이 폭력으로 바뀌는 사태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전하자 중국 지도자는 젊은 이들에게 그것을 확실히 이해시키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중공은 애국심 고취를 정권 지지의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중국이 직면한 더 긴급한 과제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정부 소유의 공기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동기 유발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됩니다. 공기업은 임원들에게 상업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라는 이윤 개념은 주입시키고 있지만 오너회사 주인처럼 행동하게 만들 유인구조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국진민퇴' 즉, 국영기업이 앞서고 민영기업은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대체로 중국이 경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걸로 전망했습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마 시진핑에 대해 당시 거의 모든 이들이 한 착각을 그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하튼 중국이 고쳐야 하고 고칠 수 있다고 본 지점은 모두 빗나갔습니다.
3. 중국 외 다른 국가에 대한 그의 전망
그는 지독하게 현실적인데, 중국이 못 고칠 걸로 본 지점도 많습니다. 정리하면 중국은 절대 1인 1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중국의 대만 통일은 불가피하며, 중국의 법치와 부패 척결은 난망하며, 부실한 지적재산권은 아이폰을 만들어낸 미국과 같은 혁신을 중국에 안겨주지 못할 거라고 단언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그의 엇나간 전망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더 눈에 띕니다. 그는 2013년에 이미 '아랍의 봄'은 실패할 것이고 중동의 석유 패권은 점차 힘을 잃을 거라고 내다봤습니다. 유럽은 불가능한 유럽통합으로 침체에 빠질 것이며 태국은 탁신이 불지핀 점진적 민주화를 막을 수 없다고 봤습니다. 미국은 약간 틀렸습니다. 그는 미국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봤지만, 현실에선 그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는 말미에 다가올 최대의 위협으로 다른 것도 아닌 보호무역의 확산을 꼽았습니다. 이 책이 나온 게 트럼프도, 무역전쟁도 일어나기 전인 2013년이란 걸 떠올리면 대단한 통찰이자 '촉'입니다. 중국만 엇나간 게 아니다. 현재 세계는 그가 내다본 '모범 답안'에서 거의 모두 벗어나고 있다. 우려스러운 점입니다.
한국인 입장에서도 꼭 봐야할 책입니다. 세계정세 이해를 넓히는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저출산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이 담겼습니다. '싱가포르' 챕터는 그냥 '한국' 챕터로 이해하고 봐도 되는 수준입니다. 이외에도 여러 촌철살인이 담겼습니다. 인생 다 살아본 구루가 '될 일'과 '안 될 일'을 분별해 놓은 가이드북인 것 같습니다.
싱가포르의 미래에 대해 묻자 '모르겠다. 50년 후에도 남아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만든 나라에 대한 평이 이렇습니다. 이보다 솔직하고 냉정한 위인은 없을 것입니다. 자국에도 이러니 다른 나라를 평가하는 데 있어 얼마나 냉철했는지 알 만합니다.
처음에 언급한 '3층 레이어'에서 운은 어쩔 수 없습니다. 리콴유 같은 사람마저 시진핑이라는 변수를 예상 못했습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이미 펼쳐진 지리와 인간에 대한 치열한 공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둘을 겹쳐만 놓아도 많은 게 보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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