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I’는 Diversity(다양성), Equity(형평성), Inclusion(포용성)의 머릿글자만 따서 조합한 단어입니다. DEI는 생소할 수 있지만 아마도 ‘ESG’는 익숙할 겁니다. Environmental(환경), Social(사회적 책임), Governance(지배구조)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기업의 친환경 경영, 사회적 책임, 투명한 지배구조를 뜻합니다. 비재무적인 요소이지만 기업이 지속가능하려면 반드시 추구해야 할 철학으로 꼽힙니다.
이 중에 ‘S’ 즉 사회적 책임의 핵심 개념이 바로 DEI입니다. 2020년 5월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DEI는 사회적 책임의 중요한 덕목으로 부상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설명하자면,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비무장 상태의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입니다.
이를 계기로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시위가 시작됐으며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습니다. 이후 DEI는 미국 대다수 기업과 대학교, 정부 등에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면서 소수인종 우대 정책이 보편화되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탈매니지먼트 회장입니다. 물론 DEI에 반기를 든 인사가 애크먼뿐인 건 아닙니다. 다만 그가 워낙 유명인사인 데다 기업과 대학에서 큰손이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퍼싱스퀘어는 2004년 1월 설립됐는데 2010년을 전후해 그의 투자가 소위 ‘대박’을 치면서 지난해 기준으로 펀드 규모가 164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앨리엇매니지먼트, 서드포인트, 아이칸엔터프라이즈 등과 함께 업계 최대 수준입니다. 이러니 그의 별명도 ‘리틀 버핏’ 또는 ‘베이비 버핏’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을 공매도하고 CDS를 매입하며 수십 배에 달하는 수익을 냈습니다. 2011년에는 캐내디언 퍼시픽 지분 14.2%를 매입해 최대주주로 등극한 후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5년 만에 45% 수익률을 기록하고 엑시트 했습니다. 2020년에도 팬데믹 적전 투자한 정크본드 CDS 등을 통해 85%라는 수익률을 냈습니다.
그런데 애크먼이 처음부터 DEI에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랜 민주당 지지자로서 오바마, 힐러리, 바이든에 투표했고, ESG의 강력한 후원자였으며, 수천 명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애크먼 회장은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을 이끄는 강력한 힘은 능력주의인데, ESG 그중에서도 DEI를 향한 경주가 능력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또 “일부 계층의 DEI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정치인들의 지나친 선전이 오히려 능력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역차별을 낳고 있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도 DEI에 반대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미국의 목사이자 흑인인권운동가입니다.
무엇이 그의 생각을 이렇게 180도 바꿔놓았을까요. 최근 워싱턴포스트가 애크먼 회장과의 수 차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생각을 분석했습니다. 그의 생각을 바꾼 첫 번째 계기는 지난해 10월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인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간 사건입니다. 이때 하버드대 일부 학생들이 모여 하마스 공격의 책임을 이스라엘로 돌리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상당수 학생들이 성명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애크먼 회장은 여기에 격분한 것 같습니다. 물론 본인과 부인이 유대계 인물이라는 점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애크먼 회장도 하버드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후배들이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더 크게 실망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애크먼 회장은 즉시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에 “성명에 서명한 학생들은 월스트리트 취업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라고 공개했습니다. 일부 놀란 학생들은 서명을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애크먼 회장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학교와 총장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학교와 총장이 추구하는 DEI정책이 학생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버드 이사회가 클로딘 게이 총장 사태와 교내 반유대주의 분출에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등에 비추어 볼 때 작금 하버드 지도력과 운영력이 심각하게 우려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실제로 게이 총장은 반유대주의 움직임에 대해 “표현의 자유”라며 옹호를 했었습니다.
애크먼 회장은 또 “DEI 운동의 위선이 드러났다. 능력이 아니라 인종에 기반한 교육의 폐해다. 반유대주의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애크먼의 친구들은 애크먼이 학창 시절에도 ‘불의’ 내지는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이 고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이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하지만 애크먼의 과격한 발언과 행동은 마침 갓 취임한 하버드대 총장이 흑인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인종차별, 성차별 논란도 야기했습니다. 애크먼 회장의 하버드대 재학시절 은사였던 데이비드 토머스 모어하우스대 총장은 “흑인여성 총장의 자격 문제를 거론한 것은 숨겨진 메시지가 있는 듯하다”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애크먼의 생각은 미국의 많은 사람들(물론 백인과 유대인이 대부분이지만)에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면서 DEI를 지지하는 집단과 DEI를 비판하는 집단이 대결적인 구도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학교 입학과 기업의 고용 과정에서 소수 인종을 우대한다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에 위헌 판결을 내리며 애크먼 진영에 더욱 힘이 실렸습니다. 이 판결 이후 PwC, 화이자, 모리슨포스터 등 내로라하는 미국 굴지의 기업들이 흑인 우대제도를 폐지하거나 대폭 수정에 나섰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미국 8개 주에서 DEI정책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물론 텍사스 유타 테네시 노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 등 보수성향 지역이기는 하지만 백인 역차별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감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유타주가 승인한 DEI정책 금지법은 공립 교육기관과 공공기관에서 DEI정책을 퇴출하는 것입니다. 각종 프로그램에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고,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로 치부하는 것도 금지됩니다. 공립 교육기관에서는 일부 소수인종 학생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텍사스주는 공공기관에서 소수인종을 우대하거나 다양성을 촉진한다는 이유로 채용에 가산점을 줄 수 없게 됐습니다. 또 학교마다 설치된 ‘다문화촉진센터’를 폐쇄하고, 교내 행사에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자금지원도 중단됐습니다. 테네시주는 공립대학들이 직원들에게 편견 해소를 위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애크먼 회장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소수민족과 유색인종에 대한 배려와 포용이 오늘의 미국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고, 지나치게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다 보니 백인과 유대인들이 역차별을 받은 것도 사실인 듯 보입니다. 특히 미국 대선을 앞두고 애크먼 회장의 발언과 행동은 정치적인 논쟁거리로 부상했습니다. 급격한 인구 감소에 대비해 우리도 해외에서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논쟁이 꼭 남의 일 같지만 않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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