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직장으로 꼽는 곳이면서, 나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평가받는 회사들입니다. 한국에선 막대한 부를 가지고 여러 기업을 이끄는 집안을 재벌이라고 불러서 ‘대기업 경영자는 재벌’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도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대기업의 기준은 뭘까요? 대충 ‘돈 많고 직원 많은 회사’라는 뜻으로 알아듣긴 하겠는데, 정확히 어떤 회사가 대기업인지 구별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대기업과 재벌 총수의 의미를 한 번 알아보려고 합니다.
1. 대한민국 대기업의 조건
얼마 전, 자회사인 어도어와 벌인 분쟁 때문에 하이브라는 회사 이름이 뉴스에 매일 같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엔 조금 다른 이유로 하이브가 경제 뉴스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주로 “하이브 대기업 됐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 등의 제목이 붙은 소식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법은 대기업의 기준을 엄밀하게 정해두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름 있고 큰 회사들을 대충 대기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이 대기업의 기준을 그나마 명확하게 정해둔 곳이 있어요. 바로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입니다.
공정위는 매년 4~5월쯤 ‘대규모 기업 집단(대기업 집단)’이라는 걸 지정합니다. 대기업 집단이란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 ‘SK그룹’처럼 동일한 계열사의 묶음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공정위가 지정하는 대기업 집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기업’을 정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대기업 된 하이브‧파라다이스
지난주에 공정위가 발표한 대기업 집단에는 연예 기획사인 하이브가 포함됐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산 규모가 5조 원 이상이면 지정되는 ‘공시대상 기업집단’ 리스트에 들어갔습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서는 최초라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올해 이 리스트에 새로 진입한 기업은 하이브, 현대해상화재보험, 소노인터내셔널, 파라다이스, 영원, 대신증권, 원익 등 7곳입니다. 이로써 국내 대기업 집단은 총 88곳이 됐습니다.
이번에 대기업이 된 기업들을 보면, 요즘 잘 나가는 기업들이 어떤 곳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케이팝(K-POP)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기업(하이브)과 팬데믹 이후 살아난 여행‧레저 분야의 기업들이 눈에 띕니다. 미래 산업으로 주목받는 반도체‧이차전지 기업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공시대상 기업집단(자산 5조 원 이상)으로 지정되면, 내부 거래나 주식 소유 현황을 공시할 의무 등 여러 규제가 적용됩니다. 그리고 이런 기업 중에서 자산 규모가 10조 4,000억 원을 넘기는 경우엔 ‘상호출자 제한 기업집단’으로 추가 지정해서 더 엄격하게 규제합니다. 올해는 교보생명보험과 에코프로 2곳이 상호출자 제한 기업 집단에 추가됐습니다.
3. 대기업 총수도 함께 정해요
공정위는 자산 규모에 따라 ‘이 그룹은 올해 대기업으로 관리합니다’라고 대기업 집단을 지정하는 동시에 ‘동일인 지정’이라는 것도 합니다. 동일인 지정이란 대기업 그룹의 실질적 지배자가 누군지 정하는 걸 말합니다. 보통 우리가 ‘기업 총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의 동일인은 이재용 회장입니다.
막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기업 집단은 영향력이 강한 만큼 독과점이나 재벌가의 부당한 사익 추구 등 여러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중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기업의 실질적 지배자를 지정해 두는 것입니다.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가까운 친인척의 주식 보유 현황, 본인이 총수를 맡은 회사와 친인척 간의 거래 등을 투명하게 공시해야 합니다. 서로 부당하게 일감을 몰아주거나 이익을 제공하는 것도 금지돼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일이 발각되면 동일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번에 대기업으로 지정된 하이브의 경우 최대주주인 방시혁 이사회 의장이 동일인으로 지정됐습니다. 이후 동일인으로 지정된 국내 기업 총수 중 방 의장의 보유 주식 가치가 6위에 해당한다는 소식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급성장한 하이브 덕에 방 의장이 보유한 주식은 국내 대표 기업으로 꼽히는 SK그룹, LG그룹 총수의 주식 가치도 넘어섰다고 합니다.
4. 이번에도 논란 ‘동일인 제도’
공정위의 발표 후 하이브와 함께 큰 주목을 받은 기업은 쿠팡이었습니다. 방시혁 의장은 바로 동일인이 됐지만, 김범석 쿠팡 의장은 쿠팡이 대기업이 된 지난 2021년부터 4년째 동일인 지정을 피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동일인은 법적으로 여러 규제를 받고, 중대한 책임도 져야 합니다. 당연히 재벌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규제입니다. 그런데 김범석 의장은 쿠팡의 의결권 4분의 3 이상을 가지고 있어서 기업 총수로서의 지위가 분명한데도 동일인 지정을 피했습니다.
지난 2021년 쿠팡이 대기업으로 지정됐을 때 공정위가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못한 건 그가 미국인이고, 쿠팡이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해 ‘미국계 기업’이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정위는 일단 김 의장을 총수로 정하는 대신 ‘쿠팡’이라는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했는데, 이때 “형평성이 없다”는 비판이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면 ‘부당한 사익 추구 금지’라는 규제가 적용됩니다. 법인이 동일인이면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보니 이 규제를 피하게 됩니다.
이후 공정위는 동일인 지정에 대한 구체적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히고 3년간 논의를 했지만, 올해도 김 의장은 동일인으로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쿠팡이 완전히 ‘한국 사업에 투자한 미국 회사’의 모습을 갖춰버렸다는 게 이유입니다. 투자자도, 본사 위치도, 대주주인 김 의장의 국적도 모두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회사를 우리나라 법으로 무리하게 규제하면, 한국과 미국 사이의 국가적 통상 관계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5. 올해도 논란 남긴 동일인 제도
동일인 제도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아요. 재벌 총수 일가의 부당한 사익 추구를 막으려는 제도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빠져나갈 구멍은 늘어난다는 지적 때문입니다. 일부 회사만 규제를 빠져나가며 형평성 문제가 커졌다는 지적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쿠팡 외에도 개인이 아닌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한 경우가 있긴 합니다. 미국 기업인 GM이 투자해 만든 한국 GM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공기업으로 시작한 KT‧포스코처럼 재벌 경영자가 없거나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인 경우에도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합니다.
다만 쿠팡의 경우는 대부분 사업을 한국에서 하기에 GM(제너럴모터스)과 분명히 다르고, 확실한 최대주주가 있다는 점에서 KT나 포스코와도 다릅니다. 공정위는 이런 쿠팡의 특수성을 고려해 제도를 조금 수정했습니다. 쿠팡처럼 법인을 동일인으로 정할 수 있게 하는 예외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동일인 지정 기준을 조금 더 명확히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도 ‘제도를 빠져나갈 구멍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새로 만든 규정은 ‘기업을 지배하는 사람과 그 친족이 경영 참여, 계열사 투자, 자금 거래 등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 하에 법인을 동일인으로 정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가까운 친척이 회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으면’ 개인의 총수 지정을 피하게 해 준다는 겁니다.
이 규정 덕에 또 다른 대기업 집단인 ‘두나무’도 기존 동일인이었던 송치형 회장 대신 법인이 동일인으로 지정됐습니다. 결국 예외가 자꾸 늘어나는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형평성을 지키지 못할 바에는 아예 제도를 없애거나 대폭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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