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드업(Build Up)이라는 단어를 혹시 아시나요? 빌드업은 축구에서 '공격으로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 가는 여러 가지 과정'을 뜻하는 단어라고 해요. 스포츠 전략에서 쓰이는 단어인 거죠. 그런데 이 단어가 한국에서는 인터넷상에서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예상 못한 반전이나 충격을 주기 위해 만들어가는 준비과정', 혹은 '성공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가는 길고 지루한 노력의 과정'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어요. 가장 많이 쓰이는 용례는 "이것을 위한 빌드업이었나!"같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기업들이 만들어가는 빌드업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1. 애플은 지금, 무엇을 빌드업하고 있나
한국시간으로 10일 새벽. 애플이 신형 아이폰인 아이폰16를 공개했습니다. 저는 아쉽게도 애플 본사 쿠퍼티노의 발표 현장에 가지 못했는데요. 아마도 이번 아이폰16 행사는 가장 사람들이 기대치가 낮았던 행사였을 거예요. 가장 중요한 애플 인텔리전스의 주요 내용이 6월 WWDC에서 대부분 공개가 됐고, 업데이트 내용도 기사와 유출을 통해서 대부분 알려졌습니다.
애플 인텔리전스는 10월 미국에서 영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베타서비스가 시작되고, 12월에는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의 영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서비스. 내년에는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서비스가 시작됩니다. 한국어는 일단 계획에 없는 걸로 나와있어요.
애플 인텔리전스는 내 말을 잘 알아듣는 생성형AI가 나의 개인 비서가 되어주는 것이 핵심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AI의 언어능력이 중요하고, 결국 얼마나 해당 언어의 사용자가 많은지가 중요합니다. 한국어는 사용자가 적기 때문에 애플의 우선순위에서 빠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하지만 한국어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아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아이폰16 행사에서 주목받았던 가장 혁신적인 요소는 다름 아닌 '카메라 버튼'이었습니다.
1) 버튼 3개에서 갑자기 5개가 됐네?
아이폰16 모든 모델에 '카메라 컨트롤'이라는 새로운 버튼이 생겼는데요. 스마트폰을 세로로 했을 때 오른쪽 하단에 위치한 이 버튼은 세로로 찍을 때는 오른손 엄지, 가로로 찍을 때는 검지가 위치하는 자리에 있어요. 한번 누르면 카메라 앱이 작동되고, 두 번 누르면 사진촬영. 길게 누르면 동영상이 촬영됩니다. 미세한 움직임까지 감지하기 때문에 손가락을 대고 움직이면 줌인 줌아웃이 되기도 해서 편리하게 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카메라 앱을 작동시키려면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해서 켠 후, 화면을 슬라이드 해서 카메라 앱을 켜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카메라 컨트롤 버튼이 생기면서 이 단계가 하나 줄어든 거죠.
이런 것이 혁신??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카메라를 많이 찍는 사람에게는 편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자기기 리뷰를 하는 가젯 유튜버들의 평도 대체로 좋았어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될지는 아이폰16이 판매를 시작하면 알 수 있겠죠.
카메라 컨트롤 버튼의 등장으로 아이폰에는 이제 물리적 버튼이 5개가 생겼습니다. 기존의 아이폰15 일반 모델에는 버튼이 3개 있었는데요. 기존의 음소거 버튼이 '액션'버튼으로 바뀌고, 카메라 컨트롤 버튼이 생기면서 순식간에 5개로 늘어난 것입니다.
액션버튼은 기본적으로는 무음과 진동, 벨소리로 모드를 바꾸는 기능이 있는데요. 아이폰의 다른 기능을 작동시키도록 설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카메라 컨트롤에만 쓰이는 물리적 버튼이 또 생긴 거죠. 사실 애플이 점점 물리적 버튼을 없앨 수도 있다는 추측도 나왔는데 거꾸로 버튼이 두 개나 더 생겨버린 것입니다. 물리적인 버튼을 없애고 터치스크린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이 기술적 혁신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애플은 과거로 돌아가는 걸까요?
버튼을 추가한 것은 분명히 소비자들에 대한 충분한 리서치가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을 것. 구글 렌즈가 애플로 넘어가면 '비주얼 인텔리전스'가 됩니다.
2) AI비서를 만들기 위한 빌드업?
특히, 애플이 비전 인텔리전스라는 새로운 기능을 '카메라 컨트롤' 버튼으로 작동시키는 것을 보면서 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애플이 뭔가 빌드업을 하고 있다고 말이죠.
비전 인텔리전스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AI가 해당 이미지가 무엇인지 분석해서 알려주는 기능이에요. 구글 앱을 많이 사용해 보신 분이라면 아실 텐데요. 바로 '구글 렌즈'와 놀랍도록 똑같습니다! 애플은 이 구글렌즈를 작동시키는 물리적 버튼을 별도로 만든 것입니다. 참고로 이 비전 인텔리전스는 구글 검색엔진을 서드파티 서비스로 도입할 가능성이 크다고 해요.
애플 인텔리전스의 장기적인 목표는 개인 맞춤형 AI비서를 만드는 것이에요. 이를 위해서 애플은 사용자의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한 고객의 정보를 안전히 지킬 수 있는 '플라이빗 클라우드 컴퓨트'라는 서버까지 만들었어요. 아이폰 16에서 반도체(AP)의 성능을 크게 높였고, 후속 모델인 아이폰 17 프로에는 D램의 용량이 8GB에서 12GB로 올라간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물리적 버튼의 도입은 'AI비서'를 호출하고 소통하는 UI/UX를 고민하는 애플의 큰 그림이 아닐까요? 사실 지금도 물리적 버튼은 AI비서를 호출하는데 많이 쓰이고 있는데요. '헤이 시리'라고 부르거나 스크린의 '홈'버튼을 터치하는 것보다 물리적 버튼을 누르는 것이 AI비서를 더 자주 부르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버튼을 두 개나 도입한 만큼 상당기간 이를 유지할 것 같은데, AI비서를 만들기 위해 애플이 무엇인가를 '빌드업'하고 있다는 인상을 저는 받았습니다.
2. 로블록스는 지금, 무엇을 빌드업하고 있나
저는 6일에는 이곳 산호세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로블록스의 연례 개발자 행사 RDC2024에 다녀왔습니다. 로블록스는 포트나이트, 마인크래프트와 함께 제가 메타버스 3 대장이라고 부르는 게임인데요. 크리에이터가 중심인 게임이다 보니 비드콘 같은 크리에이터 행사와 구글 I/O 같은 개발자 행사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로블록스도 여러 가지 발표를 했는데요. 먼저 로블록스 게임(체험) 속에서 디지털 상품뿐 아니라 현실세계의 제품도 판매할 수 있게 허용. 이를 위해서 쇼피파이와 손을 잡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메타버스 속 아바타가 착용하는 선글라스를 만드는 크리에이터라면, 이와 똑같은 실물 선글라스를 만들고 이를 같이 팔 수 있는 거죠. 사용자가 디지털 상품을 구매하면, 실물 상품을 지정한 주소로 배송해 주는 것.
심지어 로블록스 속에서 현실 화폐를 거래 단위로 하는 것도 허용해 줬어요. 로블록스라는 기업의 비즈니스모델은 '로벅스'라는 가상화폐에서 나오는데요. 이 로벅스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거래가 된다는 것. 물론 현실 화폐로 거래해도 일부는 플랫폼에서 가져가게 됩니다. 또, 로블록스는 크리에이터들이 국가별로 다른 가격을 책정할 수 있도록 했어요. 모두 로블록스 내의 경제를 키우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로블록스는 게임 상에서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사람들이 많이 듣는 음악이 무엇인지를 차트로 사용자들에게 제공하기로 했어요. 로블록스가 마치 스포티파이처럼 되어가는 것. 저는 로블록스 내에서 패션아이템을 만들거나,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들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요. 많은 이들이 평범한 로블록스 게이머에서 시작해서 크리에이터로 변신하고 있었습니다. 3명에서 시작해서 진지한 게임 개발사로 커진 곳도 있었습니다.
로블록스는 게임 내에서 3D 이미지 생성에 쓰이는 '파운데이션 모델'의 모습도 공개했어요. 크리에이터들이 이를 사용해 단순작업에 쓰는 시간을 줄여주는 것. 로블록스에서 가장 핫한 'Dress to Impress'. 패션왕을 뽑는 게임이에요.
1) 사용자 10억 명을 위한 빌드업?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로블록스는 2021년 메타버스 붐을 주도했던 기업. 2021년 상장했고 한때는 시가총액이 78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지금은 282억 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 주가가 크게 오르지 않는 것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최근 2분기에 8억 9350만 달러의 매출을 냈지만 순손실은 2억 590만 달러를 기록했어요. 다행히 현금흐름은 플러스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로블록스가 적자를 계속 내면서도 회사가 유지되는 것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출은 전년동기대비 31% 성장, 일일 사용자(DAU)도 21% 성장했어요.
이렇게 적자를 보면서도 계속 새로운 기능을 개발하고 투자를 하는 것은 규모를 키우기 위한 빌드업이에요. 로블록스의 목표는 DAU 10억 명을 달성하는 것. 최근 DAU가 800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목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매년 20~30% 씩 성장해야 10년 정도 걸려서 달성가능한 목표. 세계 소셜미디어 1위인 메타의 DAU가 20억 명, MAU가 30억 명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야심 찬 목표인지 알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바주키 CEO는 전 세계 게임 콘텐츠 매출의 10%를 로블록스에서 만들겠다고 밝혔어요. 이는 게임회사의 매출뿐 아니라 게임 속에서 이뤄지는 크리에이터의 거래도 포함한 것인데요. 그동안 게임과는 거리를 두려고 했던 로블록스가 구체적으로 게임을 타겟으로 밝힌 것이 의외로 느껴졌습니다. 로블록스 같은 소셜 요소가 강한 메타버스 게임들은 기존 게임들에게 큰 위협이 되어가고 있거든요.
1997년 애플로 복귀한 스티브 잡스. 2001년 휴대용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을 출시하면서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런데 이후의 역사를 보자면 아이팟은 아이폰을 내놓기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MP3플레이어에서 시작해 휴대용 컴퓨터로 가기 위해 디스플레이, 배터리, 반도체, 메모리까지 하나하나 학습을 해나갔던 거죠.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이라는 큰 그림을 갖고 10년의 빌드업을 했던 것 같아요.
큰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빌드업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큰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조롱과 비난, 방해가 들어오기 때문이죠. 그런 외부의 공격을 이겨내면서 버티는 것은 성공을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빌드업하셨나요? 튼튼한 기둥과 벽돌로 만든 집이 무너지지 않듯이, 오늘 여러분의 빌드업은 큰 의미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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