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와 역사. 얼핏 접점이 없을 것 같은 학문입니다. 회계가 정해진 원칙에 따라 딱 떨어지는 답이 있는 학문이라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의 주관성이 반영되는 분야기 때문입니다. 이 두 학문을 잘 섞어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회계학을 가르치는 제이컵 솔 교수입니다. 이달 중순 한국회계기준원 등이 개최한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처음 방문한 솔 교수를 알아보겠습니다. 솔 교수는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경쟁적으로 빚을 쌓아가고 있는 지금, 역사에서 증명된 회계의 중요성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말합니다.
1. 정치역사학도가 회계에 빠진 이유
솔 교수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16년 출간한 저서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 왔는가’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입니다. 이 책은 대만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중국 베이징시는 이 책을 모든 시민이 읽을 것을 공개적으로 권고했다고 합니다. 글로벌 투자 전문 웹사이트 인베스토피아는 2021년 이 책을 ‘최고의 경제학 책’으로 선정했습니다.
솔 교수는 인터뷰를 하면서 정치역사학도였던 그가 회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했습니다. 역사상 강력한 국가들이 세워진 토대에 회계가 있었다는 점이 그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치가이자 ‘태양왕’ 루이 14세 왕정의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장 밥티스트 콜베르가 대표적입니다. “나는 콜베르가 근현대 국가에서 산업은 물론 시장의 개념을 형성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하는데, 콜베르는 상업이 발달한 국가에서는 통합적인 재무제표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솔 교수는 말했습니다. 콜베르는 이를 위해 많은 회계사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 그 스스로 높은 수준의 회계학적 지식을 쌓았고 그의 아들 역시 회계사로 키웠다고 합니다.
솔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회계로 인한 수많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소개합니다. 16~17세기 가장 강력한 제국 중 하나였던 스페인 제국은 엉성한 회계로 몰락을 맞게 됩니다. 제국은 유럽 내에서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유럽 밖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제대로 계산해 보면 전 세계에 산재한 항구와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벌어들이는 액수보다 더 컸습니다. 그러나 회계시스템의 부재로 왕실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지에 숨겨진 막대한 자산, 대규모 선단이 독점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수익도 제대로 인식되지 못해 스페인 왕실은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스페인 제국은 여기저기 돈을 빌리다 수입의 68%를 외국 은행에 이자로 내는 상황에 내몰리게 됩니다. 그 결과 제국 말기에는 몰락한 귀족들이 넘쳐났고, 일부 부유하고 부패한 대귀족은 민중을 굶주리게 하는 원흉이 됐습니다. 당시의 어두운 시대상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2008년 금융위기도 회계의 중요성을 간과한 데 따른 결과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금융위기를 촉발한 ‘자산담보부증권(CDO)’은 가치가 과대평가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증권들을 묶어서 만든 파생상품이었습니다. 솔 교수는 “회계감사 회사들은 은행과 규제기관에 CDO가 무척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그들은 힘도 없었고 어쩌면 그럴 의지도 없었던 것 같다”라고 서술했습니다.
금융위기로부터 15년 여가 지난 현재. 솔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어젠다는 여전히 회계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발생주의’ 회계인데요. 발생주의 회계는 현금주의 회계와 배치되는 방식으로, 현금이 직접적으로 드나들지 않더라도 거래나 사건이 발생하면 이를 장부에 반영하는 방식입니다. 거래가 결정되고 나서 실제로 대금이 지급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발생주의 회계는 큰 효력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특정 공사를 진행하기로 2024년에 결정하고 공사 대금은 2025년에 지급하기로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발생주의에서는 지급이 결정된 2024년에 비용을 ‘부채’로 인식합니다. 반면 현금주의에서는 실제로 비용이 지급되는 2025년이 되어서야 비용으로 인식합니다.
우리에게 보다 와닿는 사례는 ‘연금’ 일 것입니다. 연금은 국민에게 국가가 반드시 지급해야 하는 일종의 부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부채는 많은 국가의 회계장부에서 기록되지 않고 있는 계정 중 하나입니다. 이는 한국처럼 급속도로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가에는 더욱더 치명적입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고 있던 연금이라는 부채가,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하는 시점에 한꺼번에 현금으로 지출되면 그때서야 장부에 기록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지금 투명한 정부 회계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구온난화, 인구구조의 변화, 이념과 민족 간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실패했는데, 그 결과가 국가에 어떤 재난으로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재난이 왔을 때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필수적입니다. 회계는 결정을 도울 재무적 판단의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솔 교수는 “‘순자산 위주로 통합된’ 회계 시스템은 민주주의에 대한 보험 같은 존재”라며 “재정건전성을 지켜주고 예측 불가능한 재앙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며 정부에 대한 믿음을 시민들에게 불어넣어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나 약소국은 더더욱 자국의 재정 상태에 대해 면밀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2010년대 중반,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남유럽 위기 당시 그리스 정부의 자문 역할을 맡기도 한 솔 교수는 인터뷰 중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2016년께 EU 내 강대국 중 한 곳인 A국이 상대적으로 소국이었던 B국에 당시 돈으로 1억 2000만 유로에 달하는 빚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A국의 예상과 달리 B국은 재정위기를 겪은 이후 국가 회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자산 상태를 착실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발생주의 공공부문 회계기준 IPSAS를 도입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말입니다. A국의 주장을 들은 B국은 실제로 부채 규모를 계산해 보기 시작했고 오히려 A국이 B국에 800만 유로의 빚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B국이 이렇게 주장하자 A국은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2. “한국의 공공 회계는 ‘준수한’ 수준... 진보 이뤄지고 있어”
솔 교수에게 한국 정부의 재정건전성 관리는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물었습니다. 그는 한국이 예산에서는 발생주의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준수하다’고 평가했지만 제대로 예산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결산까지 통합된 회계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재정건전성을 관리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재정준칙’이 있습니다. 재정준칙이란 재정의 총량을 수치화해 법제화함으로써 건전성을 관리하는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간 여러 정부가 GDP대비 국가채무비율과 재정수지비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재정준칙을 도입하고자 노력해 왔지만 아직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그런데 솔 교수는 재정준칙이 별 효과가 없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도 재정준칙을 도입했지만 이는 결국 매년 부채 상한을 올려야만 하는 ‘정치적 재난’을 초래했다”며 “제대로 된 원칙이 없이는 재정준칙도 코로나19, 전쟁, 유가상승과 같은 ‘재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될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솔 교수는 “이미 준수한 회계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한국에서 많은 전문가 집단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재정 건전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 진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진영에 상관없이 진정으로 변화의 의지를 가진 지도자가 중요하다고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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