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우리의 체감처럼 불황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시 경제를 다루는 금융기관들이 앞 다퉈 우리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데요. IMF(국제통화기금)는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5%에서 2.2%로 하향 조정한 데 이어, 내년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로 발표했고요. 26일 골드만삭스 역시 내년 한국 경제 성장률을 기존 2.2%에서 1.8%로 하향 조정한 전망을 냈습니다. 한국은행은 28일 올해 경제 성장률을 2.4%에서 2.2%로, 내년 경제 성장률을 2.1%에서 1.9%로 하향했습니다. 최근 한 달 동안 이어진 하향 조정의 레이스입니다.
사실 수출을 제외한 내수 소매 시장 경기는 더 좋지 않습니다. 통계청의 소매업태별 판매액 조사에 따르면 2024년 3분기 기준 국내 소매채널 판매액은 158조 3649억 원(잠정치)으로 전년(158조 8107억 원) 대비 역성장했고요. 2024년 9월 기준 소매판매액 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2.2% 하락했습니다. 이는 국내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판매 활동을 하는 소매업체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가 전체적인 한국 경기 전망 이상으로 부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불황이 길어지고 있는 요즘 소비 트렌드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더 저렴한 제품을 소비하는 성향인 ‘트레이딩 다운(Trading Down)’이고요. 다른 하나는 평소엔 절약하더라도 특정 상황에서는 값비싼 제품이나 서비스에 과시적 소비를 하는 ‘스플러지(Splurge)’입니다.
어떻게 보면 배치되는 두 가지 소비 행태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경기 불황에도 작은 사치, 과시적 소비를 포기하지 못하는 밀레니얼 및 Z세대의 성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회사 근처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면서 절약을 하는 소비자들이 주말에는 성수동 유명 레스토랑에 방문하여 외식을 하고요. 넷플릭스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히트로 방송에 출연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셰프들의 음식점에 ‘오픈런’이 펼쳐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1. 트레이딩 다운에 대응하는 법
트레이딩 다운이 일어나고 있는 대표적인 카테고리는 식료품(Grocery)이고요. 이로 인해 식료품 등 장보기 카테고리를 다루는 판매채널인 대형마트가 그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26일 발표한 2024년 10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 통계에 따르면 ‘대형마트’의 매출은 전년 대비 3.4% 감소했는데요. 대형마트의 전년 대비 구매 건수가 0.8% 감소한 데 반해, 구매 단가는 이보다 3배 더 큰 2.7%의 하락세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대형마트의 매출 감소가 단순히 소비자들의 판매채널 이탈 영향(구매 건수 감소)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요. 대형마트 안에서도 ‘더 저렴한 상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났기 때문(구매 단가 감소)이라 해석 가능합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소비자들이 단순히 더 저렴한 유통채널을 방문하거나, 더 저렴한 대체 상품을 구매하는 형태로만 트레이딩 다운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소비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들은 생산 공장, 제품 성분표까지 비교해 가면서 최대한 유명 브랜드와 유사하지만, 가격은 훨씬 저렴한 ‘가성비’ 제품을 찾는 데 혈안이 돼있습니다. 예컨대 매일우유 공장에서 만든, 성분마저 동일하지만, 매일우유보다는 훨씬 저렴한 이마트 노브랜드 PB(Private Brand) 우유 상품을 대체 선택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소매업체들이 트레이딩 다운에 능해진 현명한 소비자에게 대응하기 위해선 결국 똑똑해진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조언합니다. 동일한 가격에 제품 가격 양을 줄이거나 품질을 낮추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요. 차라리 대용량이나 소용량 상품을 내놓고 그에 맞춘 차등 가격을 설정하여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스플러지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하나 원가가 지속적으로 오르는 상황에서 소매업체들이 마냥 가격을 낮추면서 경쟁하긴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트레이딩 다운과 함께 찾아오는 스플러지, 즉 ‘과시적 소비’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팬데믹 이후 국내 미디어에서 ‘보복 소비’라는 단어를 한창 사용했던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전 세계에는 ‘둠 스펜딩(Doom Spending)’ 열풍이 불었습니다. 불확실하거나 어려워 보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평소에 구매하지 않을 물건을 구매하는 현상을 뜻하는데요. 특히 MZ세대가 이런 소비 현상을 주도했고, 최근까지도 이 내용을 다룬 글로벌 분석기관의 보고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딜로이트의 <Consumer Signals Link Index> 보고서에 따르면 특히 한국 소비자들의 과시적 소비 성향은 조사 대상 20개 국가 중 4위로 매우 높게 나타났습니다.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의 월평균 과시적 소비 지출액은 59달러로 조사 대상 20개국 평균인 40달러를 크게 상회했는데요. 바꿔 말한다면 이들의 과시적 소비를 끌어당길 수 있는 유통업체, 브랜드라면 트레이딩 다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비교적 높은 가격’을 합리화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과시적 소비는 값비싼 ‘럭셔리 브랜드’, ‘최상위 부유층’을 중심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2000원짜리 과자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브랜드에서 2000만 원짜리 과자를 만들어서 판다고 해서 최상위 부유층이 사줄까 생각한다면, 이건 다른 이야기라는 거죠. (물론 2000만 원짜리 과자를 판매할 수만 있다면,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과시적 소비는 고객의 세대와 계층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요.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는 과시적 소비에도 ‘트레이딩 다운’이 동반된다는 겁니다. 예컨대 평소 성수동 유명 베이커리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 먹는 직장인 고객에게 ‘투썸플레이스’는 트레이딩 다운으로 이동할 판매채널이 될 수 있지만요. 용돈을 받아 크리스마스 파티를 기획하고 있는 10대 여자 아이들에게는 투썸플레이스 케이크는 과시적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평소 럭셔리 브랜드 외투를 입고, 매스티지 브랜드 티셔츠를 입는 사업가가 경기 불황이 계속되자 럭셔리 브랜드 외투는 포기하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 ‘유니클로’나 ‘무신사 스탠다드’ 티셔츠나 양말을 트레이딩 다운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평소 네이버에서 최저가 검색을 하여 동대문 보세 티셔츠를 사던 어떤 고객에게는 ‘유니클로’나 ‘무신사 스탠다드’가 스플러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트레이딩 다운과 스플러지는 소매업체와 브랜드의 상황과 전략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리 브랜드의 현 위치와 고객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오늘 이야기가 브랜드의 가치와 프라이싱을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힌트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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