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쿠팡이 먼저 물러설 이유? 없었습니다
지난 8월 14일, 쿠팡과 CJ제일제당이 약 2년 동안 이어온 납품단가 갈등, 일명 ‘햇반 전쟁’이 갑작스럽게 끝났습니다. 언론에서는 주로 쿠팡이 먼저 화해를 제안했다는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요. 그 배경으로는 올해 2분기 쿠팡의 적자 전환과, 알리익스프레스를 비롯한 C커머스의 확대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쿠팡의 실적을 보면, 이런 해석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처음에는 쿠팡과 CJ제일제당이 서로 중요한 파트너인 만큼, 금방 합의할 거라는 예상이 많았는데요. 그런데 계속 시간이 흐르고 갈등이 길어졌던 이유는, 서로 거래를 중단해도 크게 손해 볼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쿠팡이 정말로 급해서 먼저 화해를 제안했다면, 이번 실적 발표에서 그와 관련된 신호가 감지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올해 2분기에도 쿠팡의 매출은 파페치를 제외하고 전년 대비 30% 가까이 성장했습니다. 적자 전환 역시 파페치 인수와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으로 인한 일시적인 것으로, 오히려 핵심 사업인 프로덕트 커머스 부문은 수익 면에서 역대 최고 성과를 기록하기도 했죠.
따라서 쿠팡이 성장성이 부족해서 CJ제일제당과의 화해를 시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수익성 확대를 위해서도, 납품가 갈등이 있었던 CJ제일제당과의 화해가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갈등의 핵심이었던 납품가 인상 문제를 고려하면, 화해를 통해 매출은 늘어날 수 있지만, 수익성 개선에는 한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이러한 점을 모두 고려했을 때, 쿠팡이 먼저 적극적으로 화해에 나섰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 보입니다.
2. 오히려 CJ가 더 급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CJ제일제당의 최근 실적은 어땠을까요? CJ제일제당이 LG생활건강과 같은 대기업들이 이미 쿠팡과의 갈등에서 물러섰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해외 매출 덕분이었습니다. 2023년 1분기까지 해외 매출은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며, 국내 매출 부진을 상쇄하는 역할을 해왔거든요.
하지만 작년 2분기부터 해외 매출 성장세가 서서히 둔화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거의 정체된 상태입니다. 동시에 국내 매출도 소재 식품이 부진한 가운데, 가공 식품이 그나마 이를 메꾸는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가공식품 매출을 더욱 확대하려면, 쿠팡만큼 강력한 대안이 없었습니다.
물론 CJ그룹 전체가 쿠팡과의 대립 구도를 계속 유지했다면 더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CJ대한통운이 네이버에 이어 신세계 그룹과도 전략적 협업 관계를 구축하면서 쿠팡에게 물류 물량을 빼앗길 우려가 줄어들었고요. 올리브영도 뷰티 카테고리에서 더욱 확고한 입지를 다지며 쿠팡을 견제할 필요성이 약화되었습니다. 과거처럼 CJ그룹 전체가 쿠팡을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갈등을 지속할 수 있었겠지만, 상황이 변하며 그럴 명분이 사라진 거고요. 결국 매출 성장마저 정체되자, CJ제일제당이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둘 모두 화해 후가 더 중요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CJ제일제당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언론 기사들이 쿠팡이 먼저 숙였다는 논조를 보였다는 건, 쿠팡이 화해 과정에서 어느 정도 CJ제일제당을 배려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는 곧 한쪽이 저자세를 취했다기보다는, 서로의 이익을 고려한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뜻하고요.
특히 단기적으로는 이번 화해가 CJ제일제당과 쿠팡 모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겁니다. CJ제일제당은 추석 선물 수요를 통해 매출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고, 쿠팡은 8월 와우 멤버십 인상을 앞두고 또 하나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게 되었으니까요. 한 관계자는 이번 화해를 두고 "명분은 CJ가, 실리는 쿠팡이 가져갔다"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비유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CJ제일제당은 이번 결정을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유통 채널을 다변화하고, CJ더마켓과 같은 D2C 역량을 키울 수도 있었지만요. 다시 쿠팡과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면서, 쿠팡의 독주를 저지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리테일 업계에서 지배적인 사업자의 등장은 브랜드사에게 결코 긍정적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쉬운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쿠팡에게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국내 이커머스와 전체 유통 시장에서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겠지만, 대만과 파페치 등 해외 사업에서의 가시적인 성과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2분기 실적 발표에서도 글로벌 사업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피했던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쿠팡이 지금처럼 내수 유통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더라도, 글로벌 확장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기업 가치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앞으로 쿠팡의 미래는 국내 사업보다는 해외 사업 실적에 더욱 좌우될 가능성이 큽니다. CJ제일제당과의 화해로 당분간 국내 사업을 일시적으로나마 확장할 기회를 얻었으니, 이번에 새로이 확보한 시간 내에 반드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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